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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당연하지 않은 것들

등록 2023-10-22 18:51수정 2023-10-23 02:39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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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명인(命人) |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햇살이 노곤한 오후, 깜빡 졸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경쾌한 여성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잠이 덜 깨서였을까? 이제는 너무 상투적인 이 말이 나는 갑자기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하마터면 물을 뻔했다. “정말요?”라고. 이처럼 나는 종종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던 이 세계가 문득 기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마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에 막 도착한 사람처럼 막막하다.

나에게 이런 증상이 시작된 것은 20여 년 전이었다. 산타클로스처럼 차려입은 젊고 예쁜 여배우가 시시때때로 티브이에 등장해서 화사하게 외치곤 했다. “부자되세요!” 아무리 광고라지만, 티브이에서 저런 말을 이제 대놓고 한다고? 하지만 어느새 광고에서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그런 덕담을 당연한 듯이 건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돈에 대한 노골적인 욕망을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어지러웠다. 누군가는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무슨 죄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당연히 죄는 아니다. 하지만……, 급기야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자동차로 대답했다는 광고가 등장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 천박한 광고가 오래가지 못할 줄 알았다. 오판이었다. 남편의 죽음을 배경으로 한 보험 상품 광고는 “10억을 받았습니다”로 시작했고, 죽어서도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는 아버지가 되라고 협박했다. 카드 회사들은 경쟁적으로 “열심히 일한 당신” 빚지라고 부추기더니, 아이들과 함께 보는 티브이에 사채 광고들까지 버젓이 등장했다. 대부업체들은 마치 누구에게나, 언제라도, 아주 간단하게, 필요한 돈을 거저 줄 것처럼 경쟁적으로 광고했다. 결혼정보업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결혼정보업체의 메인 카피는 “결혼은 정보다”였다. 그래도 사람에겐 염치라는 것이 있어서 위선도 떨 줄 알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업들의 광고는 눈을 부라리며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젠 위선도 사치라고. 돈만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고.

기업들은 단지 우리 마음속에 애초에 들어있던 욕망을 자극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는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사지 않는다. 우리는 기업이 강요하는 것들을 산다. 그렇지 않다면, 반도체 강국에서 파는 휴대폰 배터리가 2년을 넘기기 어려울 리 없다. 내가 살 때 최신형이던 휴대폰은 몇 달 사이에 구형이 되어버리고,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세상에서 냉장고와 세탁기는 점점 더 커진다. 신기술로, 새로운 디자인으로 기업은 날마다 우리의 필요를 창조해낸다. 무심코 했던 클릭 한 번 때문에 줄줄이 뜨는 광고들은 매 순간 우리의 욕망을 창조해낸다. 사람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온기가 사라진 허한 자리를 끊임없는 소비로 채우기 위해 우리는 점점 더 많이 일해야 한다.

이런 게 과연 자연스러운 일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제와 삶의 양식은 너무도 강고해서 마치 자연법칙처럼 거스를 수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아직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완전히 우리 삶을 지배하기 전,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생산하며 살았기 때문에 돈을 벌어서 무엇에 써야 하는지를 몰라서 공장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이 체제는 인위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공유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던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태워죽이고야 성립되었다. 당신은 상상해본 적이 있을까? 광고가 없는 세상을. 광고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필요로 할까? 그런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다양한 욕망에 눈뜨게 되진 않을까? 과연 그때도 우리의 욕망은 단지 부자가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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