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민 l 서울 문정고 1학년
2023년의 큰 사건 중 하나를 꼽는다면 바로 채식을 시작한 것이다. 올해 초부터 육류를 먹지 않겠다고 결정했고, 곧이어 달걀, 유제품, 해산물까지 먹지 않는 ‘비건지향인’이 됐다. 반년 가까이 채식을 삶에 녹여내며 생긴 변화는 식생활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채식을 시작한 이유는 어느 순간 ‘사회적 약자로서 차별받는 내가 다른 차별에 이바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물들이 자신들을 인간의 생존, 혹은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온 지구는 그들의 거센 항의에 뒤덮였을 것이다. 죽은 동물과 동물을 착취해 얻은 것들에 신선함을 기준으로 등급을 매기는 일도 불쾌하게 느껴졌다. 마트에서 ‘질 좋은’ 고기, 달걀, 우유를 사는 것이 더는 즐겁지 않았을 때 비로소 채식을 지향하겠다고 다짐했다.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동시에 채식 이후 그동안 알지 못했던 무수히 많은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급식을 먹을 수 없어 도시락을 싸 다니고, 비건 식당이 아닌 곳에서 외식해야 할 땐 열에 아홉은 먹고 싶지 않은 샐러드를 먹게 된다. 여태까지 겪어온,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식당만 갈 수 있는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비장애인, 비채식인인 사람들과 달리 밥 한번 먹는 일에 무수한 제약이 따른다.
대한민국의 채식 선택권이 매우 한정적이라는 것을 런던 여행 뒤 제대로 깨달았다. 채식 식당이 많은 것은 물론, 비채식 식당에도 채식 옵션 메뉴가 있다. 마트나 편의점에도 식물성 재료를 기반으로 한 식품들이 많았다. 영국뿐 아니라 외국에서 널리 쓰이는 구글지도 앱은 휠체어 접근성 정보가 정확히 표기되어 있다. 덕분에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한국에서보다 편히 다닐 수 있었다.
런던은 채식커뮤니티 사이트 ‘해피카우’가 채식주의자가 살기 좋은 도시 1위로 선정한 곳이다. 지난 8월 칼럼에 썼듯 버스, 공공건물을 비롯해 도시 곳곳에서 장애인 접근성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느낄 수 있었다. 또 런던 중심 거리 곳곳에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깃발인 ‘프라이드 플래그’가 걸려 있을 만큼 성소수자 인권에 포용적이기로도 유명하다. 한국에 와서 조금 더 정보를 찾아보니 장애인 성소수자 커뮤니티 ‘리가드’(Regard)가 이중적인 소수성을 가진 장애인 성소수자들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소수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쉽고 그들끼리 연대도 수월한 게 런던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비건 식당, 베이커리 사장님들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부터 한국에서도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단순한 가게 주인과 손님 이상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 중 대부분이 채식지향인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강연하며 장애 인권에 관해 이야기하는 나처럼, 그들도 식당 운영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세상에 알리기에 결이 잘 맞는다고 느낀다.
또한 본인들이 채식한다는 사회적 소수성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소수성에도 더 열려 있다. 덕분에 그동안 가본 비건 식당들은 휠체어가 접근하기 편리하거나 직원들이 선뜻 도움을 주는 곳이 대다수였다. 비건 식당 정보를 공유하는 에스엔에스(SNS) 해시태그인 ‘#나의비거니즘일기’를 단 게시글에도 휠체어 접근성 정보를 자세하게 기재한 경우가 많다. 세계 어디에서든 소수자들 간의 연대는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게 휠체어를 타면, 고기를 먹지 않으면, 살아가기 불편하지 않으냐고 묻는다. 하지만 오히려 소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더 넓게 볼 수 있어 감사하다. 다른 또래들과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데는 소수성이 한몫한다. 어릴 땐 원망과 짜증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들이 나의 강점이라고 느낄 때, 비로소 어른에 한발짝 더 가까워졌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