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야구를 즐기고 있는 관중 모습. 연합뉴스
[뉴스룸에서] 이세영 | 전국부장
저녁마다 인터넷 야구 중계에 빠져 사는 중3 둘째 딸을 나무랐더니 “아이돌 덕질보단 낫지 않으냐”는 항변과 함께 ‘접대 멘트’ 한마디를 선심 쓰듯 투척한다. “나를 한화나 롯데 팬 안 만들어준 거, 그거 하나만큼은 아빠한테 감사해.”
1년 넘게 보이그룹 ‘세븐틴’을 추앙해온 둘째는 지난여름 나흘간 홀로 광주 친가를 다녀온 뒤 덕질 상대를 프로야구팀 기아 타이거즈로 갈아치웠다. “그 점잖던 할아버지가 티브이 앞에서 웃고 박수 치다 갑자기 ‘에잇 바보 같은 놈들’이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셔. 하도 신기해서 할아버지 설명을 들으면서 이틀 저녁을 함께 봤지. 그랬더니, 와! 이상하게 막 빠져들더라고.”
딸은 서울로 돌아오기 무섭게 유튜브 채널로 속성 야구 공부에 돌입했다. 구단의 역사가 어떻고, 팀별 프랜차이즈 스타는 누구며, 선수별 특징이 어떤지 밀린 시험공부 하듯 몰아쳐 학습하더니, 얼마 안 가 아비와 중계를 함께 보며 경기 상황과 선수의 퍼포먼스에 대해 이런저런 품평하는 단계까지 올라왔다. 세세한 경기 규칙과 상황별 맞춤 전술을 설명해주면 ‘술만 마시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까지 아느냐’며 양손 엄지를 치켜세운다.
딸의 야구 덕질은 자연스럽게 애착 구단의 연고지이자 아비의 고향인 광주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 갔다. 며칠 전엔 느닷없이 “광주가 좌파 도시야?”라고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지길래 연유를 물으니 “광주라는 도시가 궁금해져 유튜브를 검색하다가 그런 표현을 봤다”고 한다. 그러더니 산만한 10대답게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제 얘기다. “내가 나고 자란 데는 서울이잖아? 근데 요즘은 광주랑 내가 연결돼 있다는 그런 느낌이 막 들어. 나한테 광주는 한화의 대전, 롯데의 부산하고는 완전히 다른 도시인 거지. 내년엔 꼭 광주 챔피언스필드 가서 할아버지랑 타이거즈 경기를 직관하고 말겠어.”
3년 뒤 아흔을 맞는 아버지는 이런 손녀가 대견한 듯했다. “선대부터 살아온 토박이도 아니고, 서울이 어떻게 고향일 수 있겠냐. 인생 말년에 사랑하는 손녀한테 소중한 경험 하나를 내가 선물했구나. 허허.” 이런 아버지도 20대에 떠나온 고향 제주를 평생 그리워하며 사셨고, 당신 고향과의 끈이 자식 대에 끊기는 게 아쉬웠던지 세 아들이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으로 시작하는 주민등록상 본적지를 바꾸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에게 제주가 그렇듯, 서울살이 34년째인 내게도 광주는 이런저런 소개문에 적어 넣는 출생지 이상의 각별한 공간이다. 내 몸과 정신을 성장시킨 곳, 부모와 친지들이 삶을 이어온 곳, 괴롭고 외롭고 쓸쓸할 때면 생각나는 곳, 언젠가 돌아갈지 모를 본향이자 내 자녀들도 정서적 유대의 끈을 놓지 않았으면 하는 곳.
행정안전부 고향사랑 기부제 홍보안. 행정안전부 제공
이런 고향을 말과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올해는 지역 살림살이에 보탬이 될 만한 물질적 기여를 해보려고 한다. 올해 1월부터 시행된 고향사랑기부제가 그 기회다. 자신의 주민등록지가 아닌 지자체에 일정액을 기부하면 최대 10만원 세액공제와 함께 기부금액의 30% 이내에서 답례품을 준다. 내가 부모님이 사는 광주 서구에 10만원을 기부하면, 연말정산 때 10만원을 고스란히 환급받고 3만원어치 특산품까지 추가로 받는 식이다. 10만원을 기부하면 13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니 금전적으로도 이문이 남는 투자다. 더구나 지방재정에 도움이 될뿐더러 답례품을 생산하는 지역 업체들에도 혜택이 간다니, 그곳에 사는 부모님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내친김에 딸한테 소개했더니, 세븐틴 사진첩과 굿즈를 온라인 중고시장에서 팔아 전액을 ‘타이거즈의 도시’에 기부하겠단다. 다만 조건이 붙었다. 좋아하는 타이거즈 선수 김도영의 정품 유니폼을 다음달 생일 선물로 대령하라는 것. 가격을 알아보니 10만원이 훌쩍 넘는다.
불평등 거래가 분명함에도 딱히 밑진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 건 고향의 아버지까지 3대가 함께 즐길 취미 영역이 생긴데다, 아비의 고향에 대한 연고 의식을 느슨하게나마 딸에게 물려줄 수 있어서다. 딸도 헤르만 헤세를 읽을 때쯤이면 깨닫게 될 것이다. 삶이란 “여행에 대한 충동과 고향을 갖고 싶은 소망 사이에서 흘러간다”(‘방랑’)는 사실, 우리 모두는 ‘존재론적 실향민’이란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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