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바뀔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권력이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언터처블’일 거라는 미몽에 빠지게 한다. 포용과 유연함을 나약하다고 공격하는 강경론이 득세하기 쉽다.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데 익숙한 윤 대통령은 더욱 그렇다.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이번 보궐선거가 현 정권에 쓴 약이 되길 바란다. 앞으로 3년 넘게 지금 같은 국정 운영을 지켜봐야 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지난 9일 서울 강서구 발산역 부근에서 열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진교훈 후보 지원 유세에 많은 청중이 몰렸다. 진 후보의 압승으로 끝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는 민주당 지지층 결집과 국민의힘 지지층의 이완, 중도층의 정권 실망감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연합뉴스
박찬수ㅣ대기자
권력의 속성은 뻔히 타버릴 걸 알면서도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과 비슷하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상징적이다. 국민의힘 패배는 지난달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을 공천할 때부터 예고됐다. 김태우 전 구청장의 유죄판결 때문에 치러지는 선거에 당사자를 사면 복권시켜 다시 후보로 내세우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런데 그 무리수를 윤석열 정권은 거리낌 없이 뒀다.
내부에서 우려가 없었던 건 아니다. 어느 국민의힘 인사는 “당내에선 우리 책임으로 선거가 다시 치러지는 만큼 후보를 내지 말자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보란 듯이 김태우씨를 사면 복권시켜 버리니, 공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공식 선거운동 시작 전부터 국민의힘 내부 여론조사에서 적잖은 격차로 김태우 후보가 뒤진다는 얘기가 당 안팎엔 나돌았다. 불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건 자신은 불에 타지 않으리란 믿음 때문이리라. 지금 용산 대통령실을 휘감고 있는 게 바로 이 착각과 오만이다. 누가 봐도 뻔한 결말을 윤석열 대통령과 참모들만 모른 체했다.
이번 선거의 의미는 명확하다. 그동안 ‘지지율’이란 수치로만 떠돌던 민심의 이반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그 점에서 2021년 4월 열린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를 떠올리게 한다. 서울·부산 시장 보선을 9개월 앞둔 2020년 7월 한국갤럽 조사에선 ‘야당(당시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돼야 한다’는 응답이 49%로, ‘여당(당시 민주당) 후보가 당선돼야 한다’는 응답(37%)을 앞섰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당 소속 공직자의 귀책사유로 열리는 선거엔 공천하지 않는다’는 당헌·당규를 바꾸면서까지 후보를 냈고, 큰 격차로 패배했다. 그때 원칙을 지키고 무공천했더라면, 2022년 3월 대선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를 통해 민심이 돌아선 게 확인됐고, 그 이후 국민의힘 지지율이 오르면서 대선 승리의 기반을 마련했다.
강서구청장 보선은 그때보다 훨씬 현 정권에 뼈아픈 것처럼 보인다. 여야 득표율 격차가 서울시장 보선(18%포인트 차) 못지않게 벌어졌고, 국회의원 총선까지는 불과 6개월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 임기는 겨우 1년5개월 지났을 뿐이다. 이번 결과는 지난 대선 때 윤석열 후보를 찍은 중도층이 거의 완전히 돌아섰음을 뜻한다. 경제와 민생보다 이념을 중시하고, 자격 미달 인사를 오직 자기편이란 이유로 장관 등 고위직에 앉히는 인사 행태가 선거에 영향을 끼쳤음을 여권 인사들도 부인하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근래 어느 대통령보다 막강한 것처럼 비쳤다. 30%대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면서도 기반을 확장할 생각은 않고, 검찰 수사하듯이 일방적으로 국정을 밀어붙인 영향이 컸다. 그 이면에 감춘 취약함이 이번 선거를 통해 드러난 셈이다. 김태우씨를 재공천하고 추석 연휴 직전에 제1야당 대표의 구속영장을 신청해 ‘윤석열 대 이재명’ 구도로 몰아간 건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다. 그러니 선거 패배 책임을 여당 지도부에 돌리기도 민망하다.
그럼에도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책임론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김 대표는 대통령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데 온 힘을 쏟았을 뿐, 국민 여론을 솔직하게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데엔 실패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도 이처럼 대통령에게 쓴소리 한마디 전하지 못한 집권여당 대표를 찾기는 힘들다. 보궐선거 의미를 축소하려는 당 지도부 생각과 달리, 내부에선 ‘지도부 교체론’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윤 대통령은 물론이고 국민의힘이 크게 변하지 않으면 내년 4월 총선은 더 어려울 게 분명하다.
윤 대통령이 바뀔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권력이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언터처블’일 거라는 미몽에 빠지게 한다. 포용과 유연함을 나약하다고 공격하는 강경론이 득세하기 쉽다. 역대 모든 정권이 임기 말로 갈수록 측근을 중용하며 친정 체제를 굳힌 건 그런 이유에서다.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데 익숙한 윤 대통령은 더욱 그렇다.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이번 보궐선거가 현 정권에 쓴 약이 되길 바란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까지, 세계는 수십년 전의 충돌과 침략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던 한국 경제는 장기 불황에 빠져드는 조짐을 보인다. 이런 시기에 앞으로 3년 넘게 지금 같은 국정 운영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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