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 |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해외에서 외국 학자들과 만날 때마다 그들이 한국에 어떤 관심을 보이는지 물어보는데 대략 남북한 관계이거나 한류에 관심이 많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은 케이(K)드라마나 케이팝에 열광한다. 이들은 나도 보지 못한 드라마의 줄거리를 물어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한국을 재미있는 나라로 보는 것 같아 기분은 좋다. 반면, 이들이 북한의 ‘김정은’을 언급하면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둔 질문이어서 그렇다.
밖에서 인식하는 한국은 준전시 상태이거나 흥미로운 문화 콘텐츠 생산국가다. 이질적인 두 모습이 교차하는데 주관적 관찰로는 언제든 전쟁에 휘말릴 나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조금 더 강한 것 같다. 최근 방문한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아시아의 미래학자들은 대만과 중국이 전쟁하면 한국이 개입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남한과 북한의 개입으로 벌어질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이 질문의 요지였다.
사실, 한국은 선박, 반도체, 철강, 자동차 등 세계시장 점유율 5위권을 달리는 산업이 적지 않고, 과학기술 연구개발 능력도 인정받지만 이런 ‘빛나는’ 모습은 외국에서 자주 언급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요즘 세계 과학기술계는 온통 중국과 미국을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은 여전히 추격자에 머물러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는다.
그럴 때마다 ‘한국은 어떤 국가여야 하는가?’라고 스스로 묻는다. 이 질문에 말레이시아의 미래 비전은 참고할 만하다. 말레이시아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마하티르 빈 모하맛 총리가 ‘이웃 국가들의 번영에 이바지하는 말레이시아(Prosper Thy Neighbour)’를 국가의 비전으로 제시했다. 이웃 나라들이 고통을 겪으면 결국 자국의 번영과 안전을 위협하기에 이웃 나라가 잘되도록 돕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말레이시아는 이 원칙을 제시한 이후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에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을 포함하자고 주장했으며, 이들 국가의 노동자들을 상대로 직업훈련 지원에 나서는 등 인적자원 개발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2003년 정계에서 물러난 마하티르 총리가 2018년 다시 총리로 복귀한 뒤 “이념은 달라도 친구가 되어야 한다”며 주변국과의 외교 원칙으로 이 비전을 다시 강조했고 지금도 말레이시아는 이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이웃 국가를 적으로 두지 않으며 번영하도록 돕는다는 말레이시아의 비전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2001년 세계적 닷컴 버블의 붕괴, 2002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2003년 조류인플루엔자의 확산, 2004년 인도양 쓰나미, 2005년 석유 가격 폭등 등 유독 남아시아 지역을 덮친 사회적, 자연적 재난을 이 나라가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말레이시아는 2022년 국내총생산(GDP)에서 8.7% 성장했고, 지난 8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에서 평가하는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전년 대비 다섯 단계를 올라와 세계 27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말레이시아의 뒤를 이어 28위였다. 말레이시아의 경제 성장세가 지속될 것인지 속단하기는 어려워도 지난 20년 동안 해마다 5%대의 견실한 성장을 유지하면서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있는 것만큼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웃 국가의 성공을 돕는다는 비전은 작게는 이웃의 성장을 돕는 것부터 출발하고, 더 나아가 인간과 이웃하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생존을 돕는 것으로 확대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기후위기와 생물다양성 악화에 대응하는 비전도 될 수 있다. 서로를 돌보지 않으면 결국 같이 고통을 겪는다는 진리는 한국이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힌트를 제시한다. 남의 고통이 나에게 비즈니스의 기회라는 미숙한 생각이 지배하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