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제75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세상읽기] 임재성 | 변호사·사회학자
“말로 외치는 평화가 아닌, 힘을 통한 평화를 구축하겠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힘에 의한 평화’를 안보·국방정책의 핵심 가치로 설명해왔다. 최근 들어 표현의 강도와 빈도 모두 높아지고 있다. 지난 4월 방미 이후 윤 대통령은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선의에 기대는 가짜 평화”와 대비하며 ‘압도적’이란 수식까지 붙인 거다.
올해 75주년 국군의 날 공식 구호는 ‘강한 국군, 튼튼한 안보, 힘에 의한 평화’였다. 작년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첫 국군의 날 구호가 ‘튼튼한 국방, 과학기술 강군’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힘에 의한 평화’에 대한 강조가 확연하다.
그런데, ‘힘에 의한 평화’란 무엇인가? 북한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 북한과 외교적 협상을 배제하는 것? 그 어떤 것이라 해도 한심한 구호이며 후진적인 정책 지향이다.
먼저, 힘에 의한 평화가 ‘압도적 군사력 확보’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 것이라고 해보자. 이미 압도적인데 뭘 더 압도적으로 하겠다는 건지가 한심한 지점이다. 2012년 기준 대한민국 국방비는 북한 국내총생산(GDP)을 넘어섰다. 북한 국방비가 아닌 국내총생산을 넘어선 거다. 2022년 대한민국 국방비는 약 54조원, 북한의 국내총생산은 약 31조원, 1.5배 차이가 넘는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2022년 한국의 군사비 지출은 세계 9위다. 이미 충분히, 아니 지나친 ‘힘에 의한 평화’다.
대한민국 역대 어느 정부든 국방비를 지속해서 증가시켰다. 윤석열 정부가 ‘말로만 외치는 평화’, ‘가짜 평화’라고 비판하는 문재인 정부 시기 국방비 증가율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보다 높은 연평균 6.3%였다. 노무현 정부 시기는 8.3%였다. 한국전쟁 이후 그 어떤 정권이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닌 적이 있었나?
문제는 대한민국이 마주하는 최우선 안보 과제인 북한과의 군사 갈등과 북핵 문제가, 우리가 더 많은 군대와 무기를 갖는다고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1993년 1차 북핵 위기 이후 30여년 역사가 그 증거다. 한국 국방비가 가파르게 증가했지만, 북한 핵개발도 고도화되었다. 북한 역시 미사일을 쏴대며 “강력한 힘에 의해서만 진정한 평화와 안전이 보장된다”고 말한다. 악순환이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실패한 안보정책을 주술처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강한 군대와 강한 무기, 가질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다. 모든 정책은 기회비용이다. 무기를 사는 만큼 다른 예산이 깎인다. 다른 사회에서는 군비와 복지 가운데 무엇을 중시하느냐, 그 적정 비율을 두고 이른바 ‘총과 버터’ 논쟁이 이루어지곤 했다. 군사주의와 전쟁 공포가 압도한 한국 사회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물어야 한다. 힘에 의한 평화가 이렇게 강조되면서 희생되는 정책과 예산은 무엇인지, 이미 힘이 넘치는 상황은 아닌지.
다음으로 힘에 의한 평화가 ‘외교적 수단에 의한 평화’를 ‘가짜평화’, ‘말로만 외치는 평화’라 낙인찍는 정책이라면 이 또한 한심하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첫 유엔 총회 연설에서 역대 한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북한’을 언급하지 않았다. 북핵 문제 등 해결에 외교적 지렛대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선언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과의 군사 긴장과 북핵 문제는 오래된 난제이다. 북·중·러 연대가 강화되고, 국제사회가 북한에 관여할 수단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외교적 수단을 포함한 모든 정책이 강구되어야 마땅하다.
힘에 의한 평화가 외교 포기 선언이라면, 한국에 남은 일은 넘치는 무기를 더 사들이고, 한·미·일 군사훈련을 대대적으로 치르는 일뿐이다. 아, 하나 더 있다. 북한, 중국, 러시아 등이 즐기는 도심 군사행진을 서울에서 거창하게 개최하는 것이다. 북한 그리고 세계에 ‘우리가 이렇게 힘이 세요’ 하고 외치는 호전적이고 전체주의적 행사 말이다.
육군훈련소 훈련병들이 현재 쓰고 있는, 시멘트 바닥에 구멍만 뚫린 재래식 화장실 개선을 위한 예산은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배정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여러 언론의 지속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반면 10년 만에 개최된 올해 국군의 날 군사행진을 위해 소요된 예산은 100억원이 넘었다. 이것이 현재 우리의 ‘힘에 의한 평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