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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역사가 없는 나라 [김누리 칼럼]

등록 2023-09-27 09:00수정 2023-09-27 09:14

우리는 역사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야만적 행태들을 보면서 다시 역사를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역사를 망각한 나라가 아니라, 아예 ‘역사가 없는 나라’이다. 이 나라엔 역사 의식도, 역사 청산도, 역사 교육도 없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연합뉴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연합뉴스

|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1966년 11월30일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1면에는 다음날 총리에 취임하는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에게 사임을 촉구하는 귄터 그라스의 공개서한이 실렸다.

“심각한 나치 전력을 가진 당신이 총리 자리에 앉게 된다면 학생들에게 역사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당신은 책임만 떠안으면 되지만, 우리는 그 결과와 치욕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라스의 신랄한 공개 비판에도 불구하고 키징거는 예정대로 서독 3대 총리에 취임했고, 국민은 ‘치욕’을 견뎌야 했다.

물론 격렬하게 반대를 표명한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카를 야스퍼스는 항의의 표시로 아내와 함께 독일 여권을 반납했다. 젊은이들도 치욕을 감수할 용의가 없었고, 마침내 68혁명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폭탄이 터졌다. 1968년 11월7일 젊은 여성 기자 베아테 클라르스펠트는 베를린에서 열린 기민당(CDU) 전당대회 석상에 올라가 키징거 총리의 뺨을 내리쳤다. “이 나치 새끼, 꺼져!”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독일은 그다지 ‘과거 청산’을 잘한 나라가 아니었다. 특히 젊은 시절 나치 당원이었던 키징거가 총리에 오른 ‘사건’은 두고두고 독일의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상징이 됐다.

오늘날 우리가 ‘과거 청산을 잘한 나라’로 알고 있는 독일은 정확히 말하면 ‘68혁명 이후의 독일’이다. 그 이전까지의 독일은 과거 청산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였다.

1946년 헤르만 헤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그의 국적은 스위스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망명에서 돌아왔으나 ‘저 나치들이 우글거리는 나라’의 국민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위스 국적을 택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노벨상 수상 작가 토마스 만도 같은 이유로 독일로 귀환하지 않았고, 그의 형 하인리히 만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역사의 승자’를 자처한 동독을 조국으로 삼았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라는 치욕적인 수사가 따라다니던 나라가 오늘날 ‘과거 청산의 모범국’, 심지어 ‘역사민족’(Geschichtsnation)이라는 찬사를 받게 된 것은 68혁명과 빌리 브란트 총리 덕분이다. 68혁명을 통해 새로운 독일이 탄생했고, 그 상징은 젊은 시절 나치와 총을 들고 싸웠던 빌리 브란트였다. 브란트에 의해 독일은 제2의 건국을 이루었다. 나치와 정신적으로 절연한 이 새로운 나라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나라’(갤럽 2020)로 성장했다.

2017년 베를린에서 나는 ‘걸림돌’(Stolperstein)이라는 신선한 기억문화를 만났다. 나치에 의해 살해된 유대인들이 마지막으로 살던 집 앞에 박아놓은 작은 황동판의 이름이 걸림돌이었다. 걸림돌엔 살해당한 유대인의 이름과 나이, 끌려간 곳과 살해된 장소가 적혀 있었다. 매일 집 앞에서 유대인 희생자들의 사연을 마주하는 독일인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한 중년 여성은 걸림돌을 대하는 심정을 묻는 내게 “우리는 지금 역사와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야만적 행태들을 보면서 다시 역사를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역사를 망각한 나라가 아니라, 아예 ‘역사가 없는 나라’이다. 이 나라엔 역사 의식도, 역사 청산도, 역사 교육도 없다.

참으로 우리에겐 역사 의식이 너무도 결여되어 있다. 특히 윤석열 정부는 극단적으로 퇴행적이다.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려는 국방부 장관, 백선엽과 이승만을 복권하려는 보훈부 장관,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억의 길’을 부숴버린 서울시장, “대한제국이 일제시대보다 행복했겠나”라고 말하는 국방부 장관 후보자 등의 행태를 보라. 해방된 나라에서 식민 부역자들이 칭송받고, 독립투사들이 모욕당하고 있다.

이것은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복수다. 한번도 제대로 된 청산의 역사를 갖지 못한 우리 근대사가 수구 세력의 귀환과 함께 다시 오래 누적된 악취를 뿜어내고 있다.

역사 청산의 부재는 무엇보다도 부실한 역사 교육에 기인한다. 본시 역사의 정수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최근 과거이지만, 우리는 근현대사를 너무도 허술하게 가르친다. 역사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법’을 쓴 장남주는 베를린의 기억문화를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전쟁”이라고 했다. 그렇다. 역사에 대한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야말로 미래를 가르는 가장 치열한 전쟁이다. 결국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지금 한국에선 유례없는 역사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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