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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교육자가 혁명을 기다리는 이유

등록 2023-09-21 15:48수정 2023-09-22 02:40

‘68혁명’ 당시 프랑스 파리 모습. EPA 연합뉴스
‘68혁명’ 당시 프랑스 파리 모습. EPA 연합뉴스

[세상읽기] 이병곤ㅣ 제천간디학교 교장

답답하다. 2023년 한국. 교육으로 세상 바꾸기란 힘들겠다는 판단이 든다. 혁명이 일어나면 좋겠다.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나 전세계로 번졌던 문화 혁명을 꿈꾼다. 그해 봄, 파리 근교 낭테르대학에서 시작했다. 베트남전쟁에 반대해 성조기를 불태우고 시위하던 대학생들이 경찰에 붙잡히면서부터다. 시위는 소르본대학으로 번져 학생 500여명이 잡혀갔고, 대학은 폐쇄되었다. 학생들은 되레 바리케이드를 쌓고 자동차를 불태우며 저항을 시작한다. 얼마 뒤 5월22일에는 노동자 1천만명이 동시 파업을 벌일 정도로 시위가 커졌다.

혁명은 섬광처럼 일어난다. 혁명의 물결은 피오르해안을 형성하는 빙하처럼 협곡을 깨부수며 거칠게 전진할 것이다. 무질서와 파괴를 동반한다. 얼토당토않은 일도 흔하다. 예의 바른 혁명이란 없다. 68혁명이 일어나던 파리 대학가 건물과 담벼락에는 마오쩌둥과 체 게바라, 호찌민의 초상화가 내걸렸다.

1945년 무렵 태어난 프랑스 청년 세대는 당대의 경직되고 보수적인 체제를 온몸으로 감지한다. 프랑스에서 여성은 1946년에야 선거에 참여하고, 1965년에야 남편 동의 없이 은행 계좌를 열 수 있었다. 나치 치하 레지스탕스였던 드골 대통령은 당시엔 보수 정치의 상징이었다. 과거 나치 당원이었던 서독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총리는 더했다.

68혁명 세대는 전쟁을 반대하며 평화주의를 외쳤다. 앞선 세대가 수립한 전통과 권위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성차별과 성적 억압, 인종차별에 강렬히 저항한다. 성 해방을 외치며 독일의 실험적 공동체 ‘코뮌1’이 만들어졌다. 권위주의를 해체하려면 그 출발점인 ‘부르주아 핵가족’ 개념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 아래 디터 쿤첼만을 비롯한 젊은 남녀 13명이 주거공동체 운동을 시작했다. 성적 억압을 포함한 모든 권위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활방식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일상을 혁명하라’ ‘사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는 코뮌1의 구호는 지금까지도 잘 알려졌다.

한국 사회는 제도적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통일을 향한 외교정책은 증발했으며, 되레 동북아시아 지역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모든 경제지표의 하락과 민생 피폐는 더 말할 나위 없다. 국민은 자연재해와 안전사고에 노출되어 피해를 보는데, 국가는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재갈을 물고 있는지 언론은 조용하기만 하니 대한‘검’국은 태평성대인 양 착각이 든다. 갑갑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국 사회는 해방 이후 정치 혁명을 넘어선 일상의 문화 혁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 20대 여성 언론인 베아테 클라르스펠트는 68년 11월 기민당 전당대회장에서 단상으로 뛰어올라가 “나치, 나치, 나치!” 외치며 키징거 총리의 뺨을 때렸다. ‘코뮌1’ 참가자들은 미국 험프리 부통령이 베를린을 방문할 때 봉변을 주는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군축 시위의 일환이었는데 사전에 정보가 새 나가 11명이 붙잡혔다. 이른바 ‘푸딩 암살’이란 이름 아래 국제뉴스로 널리 보도되었으니 이들의 정치적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현실주의자가 되어라. 불가능을 요구하라. 모든 금지하는 것들을 금지하라.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 68혁명을 이끌었던 세대는 이와 같은 구호를 플래카드에 적거나 담벼락에 스프레이로 뿌리면서 시위를 지속해나갔다. 프랑스 역사학자 잉그리트 길허홀타이 교수는 “1968년 섬광처럼 빛난 유토피아는 카리스마를 잃었다. 그 유토피아는 ‘제도를 가로지르는 장정’ 속에서 왜곡 또는 좌초”되었다면서도 그때 촉발되었던 “인식 혁명은 현대 세계의 변화와 자기성찰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내린다.

역사의 어느 순간에는 혁명이 가장 큰 교육적 흔적을 남긴다. 3·1운동과 4·19혁명, 그리고 촛불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현대사를 가르칠 것인가. 한국에서 젊은 세대는 정치적으로 더욱더 되바라져야 하고, 기성세대는 더 많은 기득권을 내놓아야 한다. 엄숙한 척하는 권위주의를 혁파하지 않으면 강의실에서 학생은 여전히 침묵할 것이고, 취재 현장에서 젊은 기자는 권력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질문을 던지지 않을 것이다. 혁명은 곧 전복이다. 어느 사회든 뒤집혀야 새로운 자리를 찾아간다. 힘없이 늙어가는 자유주의자 이병곤도 기꺼이 젊은 세대의 표적이 되려 한다. 혁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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