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또 다른 오빠 이야기

등록 2023-09-20 19:00수정 2023-09-21 02:38

지난해 12월 아버지 10주기 추도식에 김종북 오빠도 올라와서 아버지와 공동체에 대해 한 말씀해 주셨다. 혼자 오실 수가 없어 오빠의 손자가 모시고 왔다. 원혜덕 제공
지난해 12월 아버지 10주기 추도식에 김종북 오빠도 올라와서 아버지와 공동체에 대해 한 말씀해 주셨다. 혼자 오실 수가 없어 오빠의 손자가 모시고 왔다. 원혜덕 제공

[똑똑! 한국사회] 원혜덕 | 평화나무농장 농부

나는 어릴 적부터 많은 ‘식구들’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가 공동체를 만들고 꾸려가신 덕분이다. 그중 교사 생활을 하다가 바르게 살아보겠다고 우리 집에 온 오빠가 있었다. 어린 내게는 ‘아저씨’가 더 어울리는 호칭이었을 그 오빠는 얼마나 성격이 강한지 가끔 울면서 학교 가는 내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창고에 가둬놓은 적도 있다. 또 다른 오빠가 있었다. 깡패 노릇을 하다가 들어온 그 오빠는 개머리판을 떼어낸 총을 늘 품에 지니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그 오빠에게 총을 받아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아버지가 생각하실 만큼 같이 사는 사람들은 그 오빠를 신뢰했다.

몇년 뒤 그 오빠는 결혼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동네에서 외떨어진 그 오빠 집에서 한시간 더 산속으로 들어간 마을에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 있는 분교가 있었다. 아이들은 2년간 학교에 다니고 나면 오로지 일만 하면서 자라났다. 그 오빠는 그 사실을 알고 1주일에 두세번씩 밤에 그 마을에 가서 그곳 청년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어느 해 그 오빠가 나의 부모님께 안부 인사를 왔다. 나를 보더니 겨울방학 때 보름간 시간을 내라고 했다. 오빠가 지도하는 청년들은 1년 내내 농사를 짓고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딱 보름을 쉬는데 그때 그들에게 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설 다음날 나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전북 임실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그 오빠와 버스를 타고 한시간 넘게 달려 산 입구 종점에서 내렸다. 내려서 산을 오르내리다 어느 골짜기에 다다랐는데 거기에 마을이 있었다.

새벽부터 온종일 그 청년들과 함께 공부했다. 그들은 순수하면서도 의젓했다. 바탕이 선하기도 했고 그 오빠와 여러해 함께하며 다듬어진 인품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으리라. 가르치는 나도, 배우는 그들도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열흘 남짓한 동안 고등학교 국어교과서 한권을 다 뗐다.

그 이듬해 경기도 부천에서 양주로 옮겨 유기농업을 시작한 아버지는 그 오빠에게 다시 공동체에 합류해 달라고 했다. 올라온 그 오빠는 얼마 뒤 그 청년들을 불러들였다. 몇년간 공동체에서 일하며 배운 그들은 결혼하고 전국 각지로 흩어져 그 지역 유기농업을 여는 1세대가 되었다.

부천 시절 아버지의 공동체는 늘 쪼들렸다. 쌀을 살 돈이 필요한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을 많이 벌이셨다. 그중 하나가 포도 기르기였다. 당시는 유기농업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였다. 작물이든 과수든 잘 기르려면 화학비료가 필요했다. 동네 사람들 모두 면사무소에서 비료를 받아오는데, 아버지는 아직 차례가 되지 않았다며 주지 않았다. 알고 보니 면사무소 직원이 돈을 바란 것이었다. 기다리면 결국은 주겠지만 그때는 늦어서 그해 포도농사는 망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가족회의를 열었다. 지금 포도나무에 비료를 줘야 포도가 제대로 열려 팔 수 있는데 면에서 비료를 안 준다. 돈을 주고서라도 비료를 받아와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 오빠가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바르게 살자고 이렇게 모여 살고 있는데 뇌물을 주면 안 됩니다. 겨울에 고구마만 먹고, 여름에는 감자만 먹고 살아도 되니까 그건 안 됩니다.” 서울에서 뇌물을 주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잘나가던 청부업을 접고 농사지어 먹고살겠다고 시골로 내려온 아버지가 실제 뇌물 줄 생각을 하셨을 리 만무하지만, 오빠가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놓이셨다고 한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1년 전 어느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왔다. 인터뷰를 끝낼 즈음에 기자가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물었다. 공동체를 거쳐 간 많은 사람 중에 누가 제일 기억에 남느냐고. 아버지는 아주 잠깐 생각을 하시다가 바로, 김종북이지, 하셨다. 나도 그 오빠가 있어서 이 세상이 조금은 따뜻하고 반듯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이제는 나이가 많아 세상 활동은 거의 못 하신다.

지난해 12월 아버지 10주기 추도식을 마치고 나서 다같이 찍은 사진. 아버지와 오랜 교분이 있으셨던 분들만 모셨는데 김종북 오빠도 앉아있다. 원혜덕 제공
지난해 12월 아버지 10주기 추도식을 마치고 나서 다같이 찍은 사진. 아버지와 오랜 교분이 있으셨던 분들만 모셨는데 김종북 오빠도 앉아있다. 원혜덕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사설] 트럼프 재선, 국익 위한 ‘유연한 외교’로 방향 전환해야 1.

[사설] 트럼프 재선, 국익 위한 ‘유연한 외교’로 방향 전환해야

파병 북한군, 능소능대와 허허실실을 구현하다 2.

파병 북한군, 능소능대와 허허실실을 구현하다

“전쟁이 온다” [신영전 칼럼] 3.

“전쟁이 온다” [신영전 칼럼]

[사설] 교수들의 줄잇는 시국선언, 민심의 준엄한 경고다 4.

[사설] 교수들의 줄잇는 시국선언, 민심의 준엄한 경고다

다시 전쟁이 나면, 두 번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연철 칼럼] 5.

다시 전쟁이 나면, 두 번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연철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