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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끊어진 90킬로, 금강산철교에서 [김영희 칼럼]

등록 2023-09-18 15:25수정 2023-09-19 02:36

금강산철교 위를 걷다보니, 당시 침목으로 이어진 짧은 철로가 무성한 덤불 앞에 끊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998년부터 10년간 이어졌다가 기약없이 중단된 금강산 관광을 수십년 전엔 전차로 다녔다는 사실이 새삼 아득하게 다가왔다... 평화를 이상주의라고 조롱하는 자들이야말로 전쟁이라는 현실을 외면하는 공상주의자일지 모른다.
6·25전쟁 전 철원~금강산 구간을 달리던 금강산전철이 지나던 철도교량이 15일 강원 철원군 김화읍 정연리 마을에 앙상하게 남아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6·25전쟁 전 철원~금강산 구간을 달리던 금강산전철이 지나던 철도교량이 15일 강원 철원군 김화읍 정연리 마을에 앙상하게 남아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김영희ㅣ편집인

‘끊어진 철길! 금강산 90키로’
강원도 철원군 민통선 마을 정연리에는 이런 글귀가 쓰인 녹슨 빛의 금강산철교가 있다. 지금은 꿈같은 이야기지만, 1931년 철원역에서 내금강역까지 개통했던 금강산선은 노면전차를 제외한 한반도 최초의 전철노선이었다. 총연장 116.6㎞ 구간을 하루 8회 운행했는데, 험준한 산골짜기를 통과하는 탓에 속도는 시속 30㎞도 안 돼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4시간 반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도 당시 쌀 한가마 값에 맞먹는 7원56전을 내고 타겠다는 사람들이 줄이어, 1936년엔 15만4천여명이 이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지난 15일 한겨레가 창간 35년 ‘삼삼오오’ 기획 일환으로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마련한 1박2일 ‘DMZ(비무장지대) 생태평화기행’에 주주·독자·후원회원과 함께했다. 금강산철교를 걸으면, 당시 침목으로 이어진 짧은 철로가 무성한 덤불 앞에 끊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1998년부터 10년간 이어졌다가 기약 없이 중단된 금강산 관광을 수십년 전엔 전차로 다녔다는 사실이 새삼 아득하게 느껴졌다. ‘힘에 의한 평화’만이 거론되며 전쟁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지금 현실 때문일 것이다.

금강산철교 끝에 철로가 무성한 덤불 앞에 끊겨 있다. 김영희 기자
금강산철교 끝에 철로가 무성한 덤불 앞에 끊겨 있다. 김영희 기자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 뒤 70년, 위태롭지만 전면전 없이 이어진 ‘차가운 평화’에 대부분은 익숙해졌다. 외려 한국전쟁 당시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철의 삼각지’ 중 하나로 대거 파괴됐던 철원군 비무장지대 일대와 민통선 마을에 가서야 그 70년이 계속 진행 중임을 깨닫게 된다.

민통선 안 철원평화전망대에 오르면 수풀 무성한 비무장지대가 바로 코앞이다. 곧 겨울을 나러 찾아올 기러기, 두루미들이 자유로이 철책을 넘나들고, 멸종위기종 44종을 비롯해 2710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가 냉전의 산물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재학생 2600여명으로 전쟁 전까지 전국에서 4번째 규모였다는 철원공립보통학교 터는 곳곳의 지뢰 때문에 고랭이나 부들이 자라는 너른 습지로 남아있다. 비무장지대 일원에 남북이 매설한 지뢰를 제거하는 데 480여년이 걸린다는 추정은 실현 가능한 일일지조차 까마득하다.

이번 기행엔 서울, 인천, 용인, 세종, 광주, 전주, 춘천 등에서 온 15살 중학생부터 80대 어르신들까지 30여명이 함께했다. 새벽에 일어나 한겨레 읽기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이들이 많았다. 토요일 배달이 안 되는 지역이니 금요일치에 섹션을 만들어 주말에 남겨 읽게 해달라는 의견, 기사가 너무 어렵고 기계적 중립으로 느껴진다는 의견 등도 대화 자리에서 쏟아졌다. 한겨레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만큼이나 한반도 상황에 대한 우려와 안타까움 또한 짙게 토로했다. 예비역 육군 대위로 평화 관련 글쓰기를 하는 30대 참여자는 “전쟁을 신화처럼 이야기하고 신앙시하는 보수담론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며 “천안함이나 연평도 사건 모두 보수정권에서 일어났는데 늘 화살이 되돌아오는 데는 한겨레 같은 진보언론이나 진보진영이 희생당한 젊은이들의 아픔을 제대로 껴안고 대응하지 못한 탓이 크다”고 말했다.

한겨레의 ’DMZ 생태평화기행’ 참가자들이 지난 15일 강원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DMZ 생태평화공원 용양보(자연 습지형 호수)를 살펴보고 있다. 보 한가운데에 전쟁 후 DMZ 경계근무를 섰던 병사들이 오가던 출렁다리는 세월의 풍상에 낡아 지지대가 되는 철선만이 앙상하게 남아 가마우지 등 새들이 찾아오는 쉼터가 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한겨레의 ’DMZ 생태평화기행’ 참가자들이 지난 15일 강원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DMZ 생태평화공원 용양보(자연 습지형 호수)를 살펴보고 있다. 보 한가운데에 전쟁 후 DMZ 경계근무를 섰던 병사들이 오가던 출렁다리는 세월의 풍상에 낡아 지지대가 되는 철선만이 앙상하게 남아 가마우지 등 새들이 찾아오는 쉼터가 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전쟁과 군사적 긴장에 가장 먼저 젊은이들이 스러져가는 것은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이다. 실제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희생자가 집중된 건 협상이 시작된 1951년 7월쯤부터 협정 체결 때까지 2년간 벌어졌던 철원 등 중동부 일대 고지전이었다. 극심한 폭격으로 산이 아이스크림 녹듯 보였다고 외신 기자가 ‘아이스크림고지’라 이름 붙인 219m 높이 삽슬봉에선 수만명이 죽었다. 열흘간 고지 주인이 24차례 바뀌었던 백마고지에서도 국군 3500명, 중국군 1만명이 사망했다. 서로 양보를 전제로 해야 하는 대화 대신 2년간 ‘전쟁’처럼 협상을 끄는 동안, 고지전은 양쪽의 정치적 수단이 돼 승패 없는 전투를 처절히 반복해야 했다.

북핵 위기로 전쟁 위기가 고조된 1994년, 미국이 세운 영변핵시설 선제공격 계획은 전면전으로 번질 경우 발생할 사망자 추정치 앞에서 멈춰섰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후 자신이 공격을 만류했다고 주장했는데, 미국이 한국에 미리 상의하지 않았던 데 대한 대응으로 ‘한국군은 절대 협조하지 말라’고 말했다는 건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북한의 ‘불바다’ 발언에 맞선 강력한 대응 발언으로 긴장을 높였던 김 대통령이 위기의 순간 다른 모습을 보인 건, 이념과 관계없이 그가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대통령으로선 처음 인천상륙작전 전승 기념식에 참석해 “공산전체주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자유세계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대통령이라면 그 뒤에 가려진 처절한 고지전의 교훈을 먼저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철원에서 돌아오는 길, 평화를 이상주의라고 조롱하는 자들이야말로 전쟁이라는 현실을 외면하는 공상주의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편집인 dora@hani.co.kr

16일 강원도 철원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군 초소.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16일 강원도 철원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군 초소.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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