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5대 왕 경종은 즉위 첫해인 975년 ‘복수법’을 제정했다. 선대 왕 광종의 ‘공포 정치’ 치하에서 대대적 숙청을 당했던 호족 세력이 원한을 갚게 해달라고 청하자 경종이 받아들인 것이다. 복수에 제한이 없다 보니 길에서 사람을 죽여도 ‘원한이 있다’면 용서됐다. 복수는 복수를 낳았고 급기야 경종의 삼촌들마저 복수를 빙자해 호족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년여 만에 경종은 복수법을 폐지했다.
복수법처럼 공적 체계를 통하지 않고 개인이 사적으로 단죄하거나 처벌하는 것을 ‘사적 제재’라 한다. 근대국가에선 개인적 복수 대신 국가가 법률에 의해 죄지은 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적 제재가 근절된 것은 아니다. 1996년 버스 기사 박기서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에게 이른바 ‘정의봉’을 휘둘러 숨지게 한 것은 대표적 사적 제재로 꼽힌다. 대중문화의 인기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학교폭력 피해자의 복수를 그린 드라마 ‘더 글로리’와 피해자의 복수를 대행한다는 내용의 ‘모범택시’ 등은 모두 공권력에 의지하지 않고 개인이 범죄자를 직접 응징하는 내용으로 대중의 환호를 샀다.
현실에선 ‘신상털기’가 주된 양상이다. 한 유튜버는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의자의 얼굴과 이름 등을 공개했고, 지난 5일에는 롤스로이스 차를 타고 인도로 돌진해 20대 여성을 뇌사에 빠뜨린 ‘압구정 롤스로이스 사건’ 피의자 신상도 공개했다.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유튜버들도 있다. 대중이 이런 사적 제재에 열광하는 것은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높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얼마 전 숨진 대전 초등학교 교사에게 악성 민원을 제기한 것으로 지목된 학부모들의 신상을 폭로하는 에스엔에스(SNS) 계정이 만들어졌다. 신고로 계정이 차단되자 ‘시즌2’를 거쳐 현재 ‘시즌3’ 계정을 만들어 폭로를 이어가고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얼굴과 실명, 직업, 사업장 등이 고스란히 노출됐고, 사업장 두곳은 결국 문을 닫았다. 계정 소개글엔 ‘법은 구멍이 나 있다. 내가 그 구멍을 메운다’고 쓰여 있다. 공적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셈이지만, 정의감을 내세운 선정성이라는 지적은 피하기 어렵다. 명예훼손에 따른 처벌은 물론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할 위험도 있다.
최혜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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