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28일 오후 인천공항공사 인재개발원에서 열린 2023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 2년 연속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말 ‘국민의힘’ 연찬회에 참석해서 “나라가 정말 거덜이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며 “우리가 지난 대선 때 힘을 합쳐서 국정 운영권을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겠나 하는, 정말 아찔한 생각이 많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여느 대통령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자극적 발언인데, 전 정권에서 부실기업 같은 나라를 물려받아 고생하고 있다는 불만을 그리 표현한 것 같다.
그런데 ‘거덜 난다’라는 말이 요 며칠 맴돌던 생각의 꼬투리를 탁 터뜨렸다. ‘그래, 이렇게 가면 나라가 거덜 날지 모르겠어….’ 혼자 한 생각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나라 걱정하는 소리가 부쩍 늘었다. 살아가기가 눈에 띄게 강퍅해졌는데, 이 나라가 난국을 헤쳐갈 수 있을까에 회의감이 든다는 것이다. 개발연대 이래 어쨌든 나라가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믿음은 있었는데, 국민의 그런 자신감이 말라가는 것 같았다. 세계 최빈국에서 두 세대 만에 선진국 소리를 듣게 된 시점에 그리된 게 공교롭다. ‘우리는 여기까지인가….’
가장 예후가 좋지 않은 병증은 사회적 갈등과 분열의 격화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총만 안 들었다 뿐, 내전에 가까운 적의가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다”며 “사회는 물론 시민의 마음 역시 분열의 상처로 고통받는, 공동체 아닌 공동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진단한다. 한국 민주주의는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기능을 잃어버렸다. 거대 양당은 상대를 척결대상화하는 혐오의 정치로 국민을 편 갈라 적대적 공생을 한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세력이 설 땅을 잃었다. 전 국회의원 이상돈(중앙대 명예교수)은 지금 정치판이 공산당과 나치당이란 극단세력이 다투던 1930년대 초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혼란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국민 가슴에 내연하는 화기를 눅이고 통합해내야 할 윤 대통령 손에 든 것이 물이 아니라 휘발유라는 게 우리를 절망케 한다. 당선 직후 다짐한 야당과의 협치는 빈말이었고, 이념대결을 밀어붙이고 생각이 다른 쪽을 ‘공산 전체주의’로 낙인찍는다. 느닷없이 ‘홍범도 공산주의자’ 같은 역사전쟁을 일으켜 사회를 갈등의 개미지옥으로 끌고 간다. 국무위원들에게 “싸우라”고 주문한 윤 대통령은 아니나 다를까 입이 거칠기로 정평이 난 유인촌(문화체육관광부), 신원식(국방부), 김행(여성가족부) 같은 이를 장관 자리에 지명했다.
정치가 죽을 쒀도 경제는 꾸준히 나아갔는데 이젠 그렇지도 않다. 올해 성장률(1.4% 전망)은 장기불황의 상징인 일본과 비슷해졌고, 내년 역시 1%대 성장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 경제가 이미 장기 저성장 국면에 와 있다”는 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진단이다. 심각한 점은 성장능력 후퇴가 혁신과 연관된 총요소생산성의 기여도 하락이 주요인이란 점이다. 이는 산업 간 불균형 확대, 소득 및 자산 불평등 심화, 위험회피 경향의 강화 등으로 한국 경제의 장점인 역동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더해 세계 최저인 합계출산율, 고령화 등으로 노동의 성장 기여도 역시 떨어질 게 분명해, 한국 경제가 일본의 30년 불황 경로를 따라갈 조짐이다. 교육 및 노동 개혁, 불평등 완화, 지역균형발전 같은 구조적 전환이 필요하지만 현 정부를 포함해 어느 정부도 해법을 내놓지 못한다.
한국 사회 발전의 한 축이었던 정부가 무능해졌는데 여기엔 공직자들의 ‘결과적 태업’이 있다. 지금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임직원들은 정을 맞는 ‘모난 돌’이 되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 있다. 승진을 위해 힘든 부서를 자원하는 것은 옛말이고, 책임질 일은 아예 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적극 행정, 창의 행정은 구호에 그친다. 그리했던 공직자가 나중에 감사와 수사에 불려 다니고, 실무선까지 처벌받는 걸 본 학습효과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그랬고, ‘검사 정권’ 소릴 듣는 현 정부는 한술 더 뜬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배리 슈워츠는 규제나 인센티브가 아니라 마땅히 할 일을 옳은 방식으로 하려는 소명의식이 좋은 사회를 만든다고 했다. 소방관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게 처벌을 두려워하거나 인센티브가 커서가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권력 잡은 자들의 무딘 ‘칼질’이 공직의 소명의식을 풍화시킨다.
이 모든 게 윤석열 정부 탓이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역사의 중대한 변곡점에서 나라의 방향타를 잡았음을 정부와 여당이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 대전환이 절실하다.
bh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