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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억될 권리

등록 2023-09-13 19:11수정 2023-09-14 02:34

[크리틱]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브람스는 20세기 직전에 죽은, 가까운 과거의 인물이지만 전기를 쓰기가 힘든 작곡가다. 공식 발표하지 않은 악보를 비롯해 많은 자료를 죽기 전에 스스로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말년에 이르면 주고받은 편지를 서로 돌려주고 돌려받는 관행이 있었던 듯하니, 적어도 자기가 쓴 편지를 없애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기작가에게는 약이 오르는 일일지 몰라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당사자가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었고 또 그럴 권리를 존중했던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좋았던 옛 시절이다. 지금 온라인은 어설픈 작은 신처럼 수많은 것을 알고 수많은 것을 잊지 않는다. 그 수많은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포함하여 사적이라고 여기는 자료가 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곳, 하지만 포렌식이라는 섬뜩한 단어가 암시하듯이 누군가는 통제할 수 있는 곳에 고스란히 물리적으로 남아 있다는 건 여간 찝찝한 일이 아니다. 아니, 사적 영역을 존중받는 것이 인간 존엄 유지의 필수 요소라고 본다면 단지 찝찝함이 아니라 기본권 침해에 대한 공포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잊힐 “권리”라는 말이 등장한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러나 잊힐 권리라는 말은 잊는 상대를 전제한다. 즉 타인의 기억으로부터 보호받겠다는 것이며, 따라서 타인의 기억에 관여하는 셈이다. 나의 기억에 대한 이런 관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에게 “기억할 권리”는 없는 것일까. 가령 어떤 사람이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장교로서 제국주의의 첨병 노릇을 한 일은 누군가에게는 잊히고 싶은 흑역사지만 누군가에게는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누군가 그 사실을 삭제하여 기억할 기회를 박탈한다면 이런 권리 침해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마치 워드프로세서에서 변경 내용 추적 버튼을 누르듯이, 그렇게 삭제했다는 사실까지 함께 기억에 담아두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까. 실제로 학자나 작가들은 이런 면에 매우 조심스러워, 예전에 쓴 글을 책에 다시 싣는 경우에 생각이 바뀌었거나 어설퍼 보이는 부분이 눈에 띄어도 손을 대지 않는 일이 많다.

사실의 삭제는 기억될 권리를 침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예는 흔히 기록말살형이라고 부르는 고대 로마의 기억 처벌(damnatio memoriae)일 것이다. 부관참시에 비교되기도 하는 이 벌은 이미 죽은 인물을 공식기록에서 말살하는 것으로, 주로 비문·조각상·화폐를 없애는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현대에는 “공산전체주의” 국가에서 사진 속 인물을 교묘히 지우는 예가 자주 등장하며, 우리도 홍범도 흉상을 철거하면 기억될 권리와 기억할 권리를 동시에 침해하는 절묘한 예를 하나 보태게 될 것이다.

기억될 권리는 기억할 권리와 맞물려 있다. 기억하려는 사람이 이미 세상을 떠난 자의 기억될 권리를 대신 행사해 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기억 처벌에서는 그것을 막으려고 해당 인물을 기억하는 사람도 함께 없애는 일이 흔하다). 오늘 신문에도 스스로 기억함으로써 죽은 자의 기억될 권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베트남전 파병, 60년의 기억” “국내 강제동원 광부들의 비극, 옥매광산 제대로 기억해야” 같은 기사가 눈에 띈다. 거리에서, 작업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기억될 권리 또한 그렇게 지켜질 수밖에 없다. 기억되고 기억할 권리를 지키는 것이 결국 잊을 권리를 지키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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