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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임시정부 뜻 떠받든 ‘홍범도-러 연대’, 냉전 논리로 흠집내나

등록 2023-09-03 18:29수정 2023-09-04 08:48

[기고] 홍범도 독립운동 왜곡 논란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최근 독립운동가 홍범도(1868년 10월~1943년 10월) 장군의 행적과 흉상 이전 문제가 큰 논란이 됐다. 때마침 올해 10월은 홍범도 장군이 이역만리 카자흐스탄 땅 크즐오르다에서 서거한 지 80주기가 되는 달이다. 중앙아시아에 묻혀 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지도 2년이 넘었다. 따라서 그의 독립운동과 나라 사랑, 그 정신과 가치,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 등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불멸의 자취를 반추하고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인 듯하다. 지난 8월29일과 31일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사 밖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과 이념을 무리하게 재단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 국무총리는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이름도 바꿔야 한다는 발언까지 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이런 방식으로 독립전쟁 영웅을 대하고 기려야 할까.

홍범도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인 189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의병과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20여년 동안 줄기차게 일제와 싸웠던 대표적 무장투쟁가다. 그처럼 오랫동안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국내는 물론 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 등지를 넘나들며 초지일관 항일투쟁을 벌인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은 물론 북한, 중국 옌볜(옛 북간도), 그리고 현재 중앙아시아의 한인들까지 모두 그를 추앙하고 있다. 그가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주요 무대였던 북한 함경도 지방과 중국 옌볜,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그의 활동과 관련한 많은 이야기가 민담과 민요,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해 전해 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홍범도는 항상 부하와 주민, 독립군을 후원하는 민중과 혼연일체가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부하와 동포들로부터 절대적 신임과 존경을 받았다는 일화가 널리 전한다. 특히 1907년 말에서 이듬해 말까지 함경도 일대에서 주민들의 절대적 성원을 바탕으로 치열한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여 수십 차례 전투를 치르며 일본 군경에 큰 타격을 주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1920년 전후 독립전쟁 때도 치고 빠지는 기습적인 유격전 방식으로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홍범도는 육사나 우리 군의 전범, 특히 게릴라전의 한 롤모델로서 상찬되고 깊이 연구 교육할 필요가 있는 영웅적 인물이다. 국방부 등 일각에서는 그가 소련공산당(1921년 6월 당시 러시아혁명 세력)과 협력하고, 그들 편에 섰다고 문제삼기도 한다. 특히 육사동창회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했다는 무리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범도는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존중하고 임시정부의 방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1919년 12월 발표한 ‘유고문’을 ‘대한민국 원년 12월 노령(露領·러시아령) 주둔 대한독립군 대장(大將) 홍범도(참모 박경철,이병채)’로 끝맺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서기 1919년이라 쓰지 않고, 임시정부 연호인 ‘대한민국 원년’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그가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은커녕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대한민국의 헌법 가치에 충실했음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원년(1919년) 12월 홍범도가 ‘노령 주둔 대한독립군 대장' 명의로 발표한 유고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공경한다는 것과 독립전쟁의 방침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대한민국 원년(1919년) 12월 홍범도가 ‘노령 주둔 대한독립군 대장' 명의로 발표한 유고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공경한다는 것과 독립전쟁의 방침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의병-독립군-한국광복군(임시정부)-국군으로 면면히 계승되는 대한민국 국군과 독립운동·무장투쟁의 맥락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중요한 원천이다. 이는 과장과 미화로 가득 찬 김일성 위주의 편협한 북한의 역사 인식 및 ‘혁명전통’, 정통성 주장과 뚜렷이 대조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국방부와 육사의 홍범도 흉상 이전이 오히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쪽에 가깝다.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항일투쟁 경력을 능가하고,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전쟁의 상징적 인물을 ‘소련 공산당원’이었다는 냉전적 논리로 흠집 내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동북지방(만주, 북간도 등)에서 러시아 자유시로 들어가기 전에 홍범도는 중국이나 러시아와 연대를 모색했다. 이 무렵 그는 임시정부 특파원 안정근·왕삼덕 등과 함께 중로(中露, 중국-러시아)연합선전부 조직에 참여하여 간도지부 집행군무사령관의 직책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중로연합선전부’는 1920년 8월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러시아혁명정부 사이에 맺은 공수동맹 조약문의 제5항 규정에 따라 설치되었다.

그는 임시정부 방침에 따라 중국·러시아와의 연대와 협력을 모색했고, 이 과정에서 독립군 부대의 자유시 이동이 가능했다. 이처럼 임시정부 방침과 자신의 정세 판단에 따라 러시아혁명 세력과 연대한 홍범도의 일련의 행위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일본은 러시아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미국·영국·프랑스와 함께 최대 7만여명에 달하는 군대를 ‘국제간섭군’으로 시베리아·연해주에 파병하였다. 따라서 우리 독립운동 세력은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적의 적’인 러시아 볼셰비키 세력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정세 개념으로 당시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가 1927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하는 배경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제 동아일보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는 1921년 6월 ‘자유시 사변’ 전후에 홍범도가 ‘조선독립’의 후원을 얻기 위해 치타정부(당시 볼셰비키파가 장악한 러시아 원동정부의 별칭, 치타는 원동정부의 수도)에 갔다거나, 치타정부의 후원으로 독립군을 모집한다는 보도를 수차례 내보내기도 했다. 1920년대 중후반에도 홍범도의 국내 진입설, 재기설을 여러번 보도했다. 이런 보도들은 그의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시베리아로 북상한 뒤 혁명 세력에 합류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한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로 전락한 약소민족들이 자신의 힘만으로 독립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당시 국제 열강의 협력과 지원, 그들과 연대를 통해 비로소 독립과 해방을 맞았다. 1920년대 전반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우리 독립운동 세력은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 등 열강의 도움을 받아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방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중국을 제외한 열강은 방대한 식민지를 경영하는 제국들이었기에 약소민족인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협력과 지원 요청을 외면했다.

정부나 공공기관이 주도하는 국가 정체성의 상징화와 기념·추모사업 과정에서 사회적 기억과 기념, 추모의 편향성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념과 추모, 교육과 활용 등에 일관성 있는 자세로 다양성을 반영하며, 국가나 사회 통합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분열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부작용이 있어서는 더욱 안 된다. 북한의 경우처럼 편협하고 왜곡된 김일성·김정일 위주의 국가적 ‘혁명전통’의 상징화가 초래한 역작용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꼭 이전 설치하겠다면, 천안 독립기념관보다는 차라리 서울 시내 한가운데 광화문광장에 설치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외국 사례를 보면 독립영웅이나 위대한 인물의 동상이나 기념물을 많은 사람이 오가고, 늘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친근한 시민의 공간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군과 육사를 사랑하는 예비역 병장으로서 진심으로 조언하고 싶다. 무려 2500여년 전 중국 고대 병법서 ‘손자’(孫子)에는 “적을 알고 나를 아는 사람은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또 이 병서에는 ‘적을 알지 못하고 자신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다’는 내용도 있다. 과연 우리 국방부와 군, 육사는 북한은 물론,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가?

장세윤 |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만주지역 독립운동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로,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한일관계연구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명예연구위원이다. ‘중국 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2005),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홍범도의 독립전쟁’(2007), ‘양세봉―남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2016),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사’(2021, 제18회 독립기념관 학술상 수상) ‘일제강점기 학살당한 한국인들’(2021)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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