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6일 서울 용산어린이정원 내 조성된 분수정원에서 열린 다둥이가족 초청행사에 깜짝 방문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전국에서 수만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정부를 향한 분노를 쏟아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가 ‘전격’ 개시된 탓이다. 심지어 정부가 오염수 방류에 문제는 없으나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무책임한 궤변을 발표하니 국민들의 불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사과나 해명은커녕 “1+1은 100이라는 사람들과는 싸울 수밖에 없다”는 공격성 메시지를 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자신을 향한 집회가 열리던 날, 그가 용산어린이정원을 깜짝 방문했다는 점이다.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어린이들과 사진 촬영을 했다고 한다. 전 국민이 자신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시점에 윤 대통령이 용산어린이정원으로 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반환된 용산미군기지 부지의 토양오염이 얼마나 극심했는가. 납, 비소, 수은, 다이옥신 검출량이 모두 기준치 초과였고 기름 유출도 문제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비판과 우려를 무시한 채 그는 ‘결단’을 내렸다. 오염 정화의 책임을 당연히 미군에 묻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정부가 토양을 정화한 것도 아니었다. 그 위를 흙으로 덮었으니 문제가 없단다. 이렇게 반환 부지는 ‘용산어린이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전격’ 개방됐다. 이후 어린이정원은 윤 대통령의 ‘잘못’이 아니라 ‘업적’이 된 듯하다. 어린이들이 그를 주제로 한 사진전을 관람하고 색칠놀이를 하니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따라서 그에게 용산어린이정원은 자기만족적 주술 같은 것이다. “오염수 방류 문제도 곧 지나가리라.”
하지만 반환 부지의 위해 요소가 정말로 사라졌을까? 비가 오면 오염 물질은 어디로 갈까? 토양오염이 어린이들에게 미칠 영향은? 윤 대통령은 향후 어떤 결과가 나와도 사과하거나 책임지지 않을 테고, 가늠할 수 없는 피해는 미래세대가 떠안아야 한다. 오염수 방류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결단’으로 역사에 남을 한-일 관계 개선을 이룩했다고 자평할 것이고, 어민들에게도 국민들에게도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 변덕스러운 정권에서 일관된 점 하나는 정부의 잘못에 대해 지도자가 결코 책임지지도, 사과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태원 참사도, 오송 참사도 사과 없이 지나갔다. 물론 성과는 자신에게 돌리고 실패는 “부하” 직원에게 떠넘기는 최악의 상사는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그 최악의 상사가 대통령이라면 어떨까. 자신의 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남을 탓하고, 국면 전환용 수사와 감사로 상황을 모면하는 지도자가 있을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수해에 대처하지 못하자 “이권 카르텔”을 공격하고, 잼버리가 패키지여행으로 전락하니 문재인 정부를 탓한다. 사과한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지금 대통령이 가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입장을 낸다. 한마디로 난 잘못한 게 없다는 말이다.
수치의 방어기제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는 책임의 외부화, 즉 ‘남 탓하기’도 있다. 자기도취에 빠진 이들은 사회적 모욕이나 자존감 손상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실패의 책임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한다. 매번 전 정부를 탓하는 것은 정치적 전략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비교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심리적 방어기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책임을 남에게 돌리면 문제 상황에 대해 무심해지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아픔에 감정이입할 필요도 없다. 동시에 나르시시즘은 수치의 방어기제로 오만함을 발동시키는데, 이 오만함은 타인에 대한 공격성, 적대감
, 권위주의적 태도로 이어진다. 그래서 수치에 민감한 이들이 오히려 겉으로는 수치심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그러나 수치를 외면하면 자신의 변화도 세상의 변화도 만들어 낼 수 없다. 문제를 회피하고 동문서답을 하는 나, 남 탓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는 나, 전문가의 말을 듣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해법을 내는 나 자신에 대해 차분히 성찰해보기 바란다. 사과할 줄 아는 성숙한 지도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비판적 자기 인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나아가 이를 풀어내는 언어를 익히면서 우리는 좀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윤석열은 과연 자신의 수치를 말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