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인류 역사에서 가장 엽기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헝가리의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아마도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피의 백작부인’이라는 별칭답게 50살인 1610년 체포될 때까지 무려 1500명 넘는 처녀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젊음과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이들의 피를 마시고 여러명을 죽였을 때는 피로 목욕을 했다고 한다. 젊은 피에 회춘의 힘이 있다는 중세 유럽인의 비과학적인 믿음에 고개를 젓게 되지만 우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조직이 늙었으니 젊은 피를 수혈하자’는 식의 비유적인 표현을 쓴다.
그런데 10여년 전 늙은 동물에게 젊은 동물의 피를 수혈하자 노화 증세가 역전되는 회춘 효과가 발견됐다. 반대로 젊은 동물에게 늙은 동물의 피를 넣으면 노화 증후가 나타났다. 피의 힘을 믿은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생각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젊은 생쥐의 피(blood)를 늙은 생쥐에게 수혈하면 만성 염증이나 기억력 저하 같은 노화 증상을 되돌릴 수 있다(왼쪽). 혈액을 원심분리하면 적혈구와 혈장(plasma)으로 분리되는데, 이 가운데 혈장이 노화에 영향을 미친다(오른쪽). 젊은 혈장에서 회춘 효과를 내는 성분이 몇가지 밝혀졌는데, 최근 PF4가 추가됐다. ‘네이처 신경과학’ 제공
그 뒤 연구자들은 피에서 노화를 억제하거나 촉진하는 성분을 찾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젊은 피와 늙은 피를 분석해 나이가 들면서 함량이 줄어드는 것 가운데 노화 억제 성분이 있을 것이고 함량이 늘어나는 것 가운데 촉진 성분이 있을 것이라는 논리다. 그 결과 지금까지 노화에 영향을 미치는 10여가지 성분 또는 세포 종류가 발견됐다.
지난 16일 학술지 ‘네이처’에는 혈소판 인자4(PF4)에 뇌의 노화를 되돌리는 효과가 있다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연구진의 발견을 보고한 논문이 실렸다. 혈소판이 만드는 단백질인 PF4는 혈액 내 농도가 나이가 듦에 따라 줄어든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지만, 혈액 응고를 돕는 성분으로 이미 역할이 부여된 상태라 간과하다 이번에야 진지하게 검토됐다.
많은 사람이 경험하듯 기억력이 떨어지는 게 뇌 노화의 첫번째 증상인데, 이는 뇌에서 기억을 관장하는 부위인 해마가 특히 노화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늙은 생쥐에게 젊은 생쥐의 피에서 추출한 PF4를 투여하자 해마의 염증이 줄어들고 뉴런(신경세포) 사이를 연결하는 시냅스가 유연해졌다. 실제 기억력에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기 위한 행동실험 결과 낯선 대상에 대한 선호도가 커졌고(봤던 대상은 기억하고 있으면 흥미가 떨어지므로) 미로에서 바른 길을 선택하는 확률도 높아졌다.
혈액에서 노화와 관련된 성분이 밝혀지면서 이를 이용한 치료제를 개발하는 연구도 한창이다. 노화를 억제하는 성분을 유전자공학으로 만들어 더해주거나 촉진하는 성분을 무력화하는 항체를 만들어 넣어주면 늙은 피가 젊은 피의 조성으로 바뀌면서 노화를 되돌린다는 전략이다. 이번에 발견한 PF4도 유력한 후보물질로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매혈이 불법인 우리나라에서 군인의 헌혈 기여도는 절대적이다. 이들의 피 덕분에 많은 환자가 목숨을 건지면서 동시에 수술 스트레스로 가속화된 노화 속도를 다소나마 늦출 수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