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행사 때마다 붐비는 교내 ‘장학카페’ 앞. 이병곤 제공
[세상읽기]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
지난 몇년 새 나는 간디수산, 간디제과, 간디네 즉석떡볶이, 간디청과의 대표가 됐다. 뭐든 팔아야 한다면 또다른 임의 업체의 대표가 될 운명이다. 나랑 상의? 그런 거 없었다. 대체 누가 이런 일을 벌인 걸까?
‘제천간디학교장학회’(장학회) 부모들이 그러고 있다. 2년 전쯤 장학회 밴드에서 판매 물품 광고를 올릴 때였다. 한 학부모가 ‘교장이라는 상징’을 가져다 이리저리 전자 명함을 만들면서 ‘놀기’ 시작했다. 물건만 잘 팔리고, 덤으로 재미까지 누린다면 말릴 까닭이 없었다.
온라인 시장 ‘제천간디장학장터’ 밴드와 오프라인 시장 교내 ‘장학카페’가 주요 판매 창구다. 학교 주변 농가에 도움 줄 만한 제철 농산물, 친환경 제품, 농수산 가공식품 같은
물품을 판매한다. 이를테면
귀농한 가정에서 기른 옥수수·바질에서부터 무농약 생딸기잼, 꿀, 토마토, 양파, 통밀 시골빵, 생강청, 접이식 의자, 침낭 등 다양하다.
지난해 6월 도예가 학부모의 작업실에서 펼쳐진 ‘봄을 담은 그릇’ 바자회. 이병곤 제공
도예가 학부모는 자신이 제작한 다기 세트와 그릇을 판매품으로 내놓는다. 디자인에 능한 학부모는 홍보 포스터와 광고물을 제작한다. 자칭 ‘술판다 엠디(MD)’와 ‘즙판다 엠디’는 장터 분위기를 돋우는 ‘바람잡이’ 노릇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거래하면서 주고받는 재치 있는 댓글을 읽으러 밴드에 들르는 참여자들도 있다. 포도주 두병을 산 가정에서 시음기를 올리면 댓글이 수십개씩 달린다. 안주 자랑도 하고, 어떤 이는 부러움을 느끼고, 그러는 틈새에 ‘엠디’들은 슬쩍, 밉지 않게 추가 구매를 유도하고….
장학회는 2010년 학부모들이 시작했다. 총책임자를 이사장, 활동가 학부모들을 이사라 부른다. 수익 사업, 장터 운영, 홍보 기획, 장학카페 팀으로 나누어 담당자를 배치하고, 매달 여러 차례 업무협의회를 연다. 스무명 안팎 ‘이사’들이 알뜰하게 살림하여 모은 장학기금은 한 해 5천만원이 넘는다. 해마다 15명 안팎 재학생들에게 교육비를 지원했다. 설립 이래 지난해 말까지 12년간 4억3천여만원을 모아 학생 260명에게 도움을 줬다.
장학회의 주력 수익 품목은 김명철 사단법인 간디공동체 이사장(한의사)의 처방과 감수 아래 제조되는 ‘한방차’와 덕산면 마을공장에서 착즙한 ‘에이비시(ABC)주스’다
. 특히 에이비시주스는 간디공동체가 설립한 사회적기업 ‘마을너머’의 스마트스토어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판다. 마을너머를 통해 자립 기반을 마련할 책임은, 19년째 근무해온 교사로서 법인 사무국장을 겸임해온 황선호 대표가 맡고 있다. 마을과 학교는 결국 ‘사람’이 이어줘야 한다는 경험과 판단 아래 이런 시도를 해오고 있다.
학교 행사 날이면 장학회 ‘사업장’ 둘레가 시끌벅적하다. 교장실 창문 너머로, 운동장 대각선 건너편에 있는 장학카페 컨테이너를 바라본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니 어묵탕이 끓는 모양이다. 두툼하게 속을 넣은 샌드위치 굽는 냄새도 가득하겠지. 밴드를 통해 미리 주문받은 물품 상자들이 바닥에 즐비하다. 그 곁엔 아나바다 장터 좌판이다. 전국 각지에서 이 산골까지 와야 하는 장학회 이사들. 재료와 기구들을 챙겨 새벽 몇시쯤 출발한 걸까? 고마워서, 흥에 겨워서, 애틋해서 목울대 부근이 뻐근하다.
‘자립’과 ‘상생’은 내게 이음동의어처럼 들린다. 서로 도와야 스스로 서는 게 가능하고, 자립할 수 있어야 누구든 도울 기반을 마련할 테니 말이다. 지난해 학교 시설 리모델링 때 자재비 급상승으로 돈이 모자랐다. 장학회 기금에서 상당한 액수를 무이자로 빌려 썼다. 고금리 시대에 엄청나게 큰 도움이었다. 장학금 덕분에 교육비 완납률은 늘 99%를 웃돈다. 한방차는 다른 대안학교 부모들이나 일반인도 살 수 있다. 살 때 도움을 주고 싶은 곳을 지정하면 수익금 일부를 모아 해당 학교로 재정을 지원한다.
댓글과 통화를 통해 물품 배송지 주소를 나누며 교류하는 기쁨, 아이와 학교에 대한 애착 형성,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즐거운 마음. 장학회는 이 모든 것을 이어주는 매듭이다. 지난해 말 경남 산청에서 열린 장학회 연말 모임에 나도 슬쩍 끼어들어 놀았다. 밤에 펼쳐진 술자리에서 반건조 오징어를 먹다가 나온 한 이사의 제안 “오, 이거 괜찮은데, 우리… 떼다 팔까?” 나는 이분들의 억척스럽고 고결한 정성을 다른 배움공동체에 떼다 팔고 싶다. 공짜로.
학교 행사 때마다 운영을 맡아주는 ‘이사님’들. 이병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