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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불능정치에 대한 경제의 경고

등록 2023-08-16 18:47수정 2023-08-17 02:11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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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복영 | 경희대 교수·전 청와대 경제보좌관

얼마 전 글로벌 신용평가회사 피치가 미국 국채 신용등급을 종전 최고등급 AAA에서 AA+로 한 단계 끌어내렸다. 금융시장은 놀라고 미국 정부는 화를 냈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미국 국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미국 경제는 강하다며 반발했다. 그런데 피치의 결정은 미국 경제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미국 정치에 대한 경고였다. 타협은 없고 벼랑 끝 대치만 있는 정치, 문제해결 능력이 없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마저 디폴트(부도)되도록 만들 수 있는 정치에 대한 경고였다. 우리 정치의 모습도 미국 정치의 모습을 빠르게 닮아가고 있다. 근저에는 경제양극화가 있다.

국가신용등급이란 정부가 발행한 채권이 부도날 위험을 평가해 매겨진다. 옐런 장관의 말처럼 미국 국채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이다. 미국 경제의 규모와 더불어 달러가 가진 지위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거래되는 금융자산과 상품 대부분은 달러로 표시되고 달러로 결제된다. 그래서 각국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도 대부분 달러로 채워지고, 그 달러로 미국 국채를 매입한다. 미국은 적자를 메우기 위해 대규모 국채를 발행해도 별 부담이 없다. 채권이 국내에서 소화되지 않으면 해외에서 소화하면 된다. 위험 프리미엄도 없고 수요도 풍부해 조달금리도 매우 낮다. 벌써 반세기 전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은 이런 달러의 지위를 ‘터무니없는 특권’이라고 비난했다.

반세기 동안 유지돼온 이 특권이 불능의 정치 때문에 위태로워졌다는 것이 피치의 판단이다. 다른 신용평가회사도 같은 이유로 2011년 미국 정부 신용등급을 내린 적이 있다. 이 특권을 위태롭게 만든 것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다. 지금 미국 경제는 매우 강건하다. 재정적자가 늘기는 했지만 국가채무비율은 하락하고 있다. 문제는 이 안전한 국채의 발행한도를 둘러싸고 미국 정치권이 거의 매년 벼랑 끝 대치를 벌이는 데 있다. 만에 하나 이 타협이 불발되었다면 만기가 도래한 국채를 상환하지 못해 디폴트가 날 수도 있었다. 옐런 장관 자신도 불과 두달 전 ‘엑스(X) 데이트’, 즉 디폴트의 날이 임박했다고 경고했다. 아무리 안전한 자산이라 해도 이런 정치적 도박을 매년 지켜봐야 한다면 신용평가회사가 등급을 내리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의례적으로 승인되던 부채한도가 10여년 전부터 민주-공화 양당 간 정치적 대결의 인질이 되었다. 하원을 장악한 보수 공화당이 민주당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를 발목잡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오바마 정부와 바이든 정부에서는 거의 매년 벼랑 끝 대치가 반복되었다. 크게 보면 이것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대립이다. 취약계층과 공공서비스 확충을 위해 정부지출을 확대할 것이냐(민주당), 아니면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세금을 깎을 것이냐(공화당)의 갈등이다. 또 경제위기의 비용을 누가 지불할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싸움이기도 했다. 2011년에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올해는 코로나 위기의 비용 분담을 둘러싼 대립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런 극단적 대치와 비타협적 정치의 원인 중 하나로 정치양극화를 지목한다.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이념적 간격이 점점 멀어진다는 것이다. 공화당 일부 의원의 보수화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 특히 문제다. 더 깊은 곳에는 경제양극화의 문제가 있다. 토마 피케티가 지적한 대로 미국의 계층 간 불평등은 날로 악화하고 있다. 국가의 보호가 부족한 저소득층은 기존 제도와 기성 정치권을 불신하고 포퓰리즘적 선동에 더 끌린다. 반면 천문학적 소득을 올리는 고소득층과 거대기업은 보수 정치인을 후원하며 감세 등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경제양극화가 낳은 비타협과 불능의 정치 현실이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타협의 정치는 실종되었다. 다행히 금권정치는 미국만큼 심하지 않지만, 정치인들은 자극적 언어와 소셜미디어(SNS)를 활용해 자기편 끌어모으기에만 힘을 쏟는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통령이 사용한 언어는 섬뜩하다. 통합이 아니라 분열과 보수의 극단화를 이끄는 모습이다. 경제적 통합의 미래도 부정적이다. 연이은 감세와 소득재분배 기능의 축소로 계층 간 불평등은 더 심해질 것이다. 무능을 넘어 불능으로 향하는 정치가 경제마저 위태롭게 하는 것이 더 이상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타협의 정치를 복원하고 경제양극화를 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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