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병수당 시범사업이 시작된 지난해 7월4일 서울 종로구 국민건강보험공단 종로지사에 관련 배너가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박현정 | 인구·복지팀장
근로기준법엔 ‘병가’가 없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언론을 통해 뒤늦게 알려진 20대 노동자의 죽음을 접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지난해 2월12일, 대기업 화장품 매장에서 판매사원으로 일하던 인력파견업체 소속 ㄱ씨가 집에서 의식을 잃었다. 쓰러지기 나흘 전 찾아간 대학병원 의사는 입원치료를 권했지만 휴가를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한달 전에도 “근무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휴가 신청이 반려됐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건 2021년 말. 극심한 두통과 고열을 호소하며 동네 병원 여러 곳을 다니며 약을 처방받았다. 고인의 업무상 질병 판정서에는 당시 상황을 추측할 단서가 남아 있다. 코로나 확산으로 매장 근무자가 3명으로 줄어든 이후 3명이 2개 조(1명 휴무, 2명은 오픈조·마감조로 나눠 출근)로 일해 여유 인력이 전혀 없었다. 아파도 일할 수밖에 없었던 ㄱ씨는 2월24일 뇌지주막하출혈로 숨졌다.
이 정도로 아픈 노동자의 병가 신청을 거부한 사업장을 제재할 수가 없는 것인지 찾아보다, 애초 근로기준법엔 ‘병가’ 두 글자가 없음을 알았다. 업무상 재해는 아니지만 아프거나 다쳐서 일하기 힘들 때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그 병가 말이다. 지금까지 알던 병가는 무엇이었나. 공무원이나 교원은 법이나 복무규정에 근거해 유급병가·유급휴직을 쓸 수 있다. 민간기업 노동자는 근로계약이나 단체협약, 취업규칙(사규)에 따라 병가 보장 여부가 결정된다.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노조가 있는 큰 기업에서 일해야 병가를 쓸 수 있다는 의미다. 병가가 있다고 반드시 유급은 아니다. 전국 493개 기업 취업규칙 분석 자료(‘누가 아파도 쉬지 못할까: 우리나라의 병가제도 및 프리젠티즘 현황과 상병수당 도입 논의에 주는 시사점’·2020)를 보면, 병가제도가 있는 사업장은 42%였으나 유급으로 운영하는 곳은 7.3%에 그쳤다.
병가가 없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아플 때 연차휴가를 쓰거나 그마저 어려우면 결근해야 한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않으므로 연차도 없다. 쉴 권리는 공평하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법으로 유급병가를 보장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과 미국뿐이다. 미국은 연방법에서 유급병가를 보장하지 않지만 샌프란시스코 등 여러 도시나 주에서 유급병가를 도입했다.(‘한국형 상병수당 도입을 위한 시범사업 운영방안 연구’·2021) 장시간 일하는 한국인들이 아파서 쉰 날은 많지 않다. 2021년 경제협력개발기구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한국 노동자들이 1년 중 질병으로 결근한 기간(출산휴가 제외)은 1인당 평균 1.7일로 캐나다(9.1일), 미국(6일), 영국(4.6일) 등에 한참 못 미쳤다.
우리는 왜 못 쉬는 걸까. 건강과 스트레스 관리도 능력이며, 아파도 버티는 것이 성실함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의 설 자리는 좁다. ㄱ씨가 겪었던 것처럼 대신 일할 사람이 없거나, 당장 일하지 않으면 생계가 막막한 사람도 많을 터이다. 아파도 쉬지 못하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져 기업도 득이 될 수 없다. 쉴 수 없는 일터는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해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22년 6월 “아픈데도 쉴 수 없는 상황은 인간을 노동력이라는 수단으로만 취급한 결과”라며 모든 임금노동자가 업무 외 부상·질병에 대해 일정 기간 휴가·휴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법제화를 추진하고, 이렇게 일을 쉴 경우 소득을 지원하는 상병수당을 조속히 도입할 것을 고용노동부와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노동부는 병가 법제화를 “검토할 계획”이라고만 밝혔고, 복지부의 상병수당은 아직 시범사업 중이다.
팬데믹 초기 정부가 내놓은 생활방역 제1수칙은 ‘아프면 3~4일 집에 머물기’였다. 모두의 안녕을 위해 시대적 화두로 떠올랐던 ‘아프면 쉴 권리’는 필요한 이들의 손에 닿기도 전에 엔데믹 선언과 함께 잊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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