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밴쿠버 인근 위성도시 랭리에 있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비영리기관 ‘히어앤나우’(Here & Now) 실내에 한 발달장애인이 그린 그림들이 벽면 등지에 전시돼 있다. 이창곤
이창곤 ㅣ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얼마 전 캐나다를 다녀왔다. 체류 중 관광지 몇곳을 둘러보았다. 압권은 ‘캐나다 로키’였다. 굽이굽이 긴 행렬을 이룬 고봉들, 그 사이로 빙하가 빚어낸 곳곳의 옥빛 호수와 폭포, 수목한계선 위의 헐벗은 고산지대와 대조적인 빼곡한 침엽수림. 대자연이 빚은 장엄함과 야성미는 실로 매혹적이었다. 미국과의 국경 인근 해안 도시, 화이트록에서 본 일몰 또한 웅숭깊고 짜릿해 한동안 잊을 수 없을 듯하다.
설상차를 타고 ‘컬럼비아 대빙원’에 올라 빙하 위를 걷는 색다른 체험도 했다. 하지만 빙원은 인류세 시대의 기후위기를 실감케 하는 또 하나의 현장이었다. 현지 가이드의 말로는 빙원은 해마다 몇 미터씩 녹아 지난 100여년 동안 1㎞ 이상 사라졌다고 한다. 빙하가 녹는 건 단순히 자연경관이 사라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식수원이 마르고, 생물 다양성이 무너지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인류의 생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인상적인 건 자연경관과 기후변화만이 아니었다. 귀국 전날, 밴쿠버 인근 위성도시 랭리 소재 발달장애인을 위한 비영리기관 ‘히어앤나우’(Here & Now)를 찾았다. 필자가 머문 숙소의 집주인, 이보상씨가 마침 이 기관을 총괄하는 사무총장인 덕분이다. 국내 굴지의 통신회사에서 고위직으로 있다가 장애가 있는 아들을 위해 캐나다에 이민 간 분이다.
히어앤나우는 현재 한국계 성인 발달장애인 22명에게 다양한 맞춤형 프로그램과 주거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기관 설립을 주도한 이 사무총장, 설립에 뜻을 함께한 밴쿠버 현지의 한국계 발달장애인 가족들, 모두의 핵심 고민이자 화두는 “우리가 더는 자녀를 돌볼 수 없을 때, 누가 우리 자녀를 돌볼 것인가”란 물음이었다.
이 사무총장은 이 물음의 답을 밴쿠버에 있는 한 현지 기관으로부터 얻게 됐다고 술회했다. 밴쿠버에 있는 캐나다인 부모들이 중심이 돼 운영하는 장애인을 위한 비영리기관 ‘플랜’(PLAN)이다. 플랜이 제시한 답은 뜻밖에도 질 높은 서비스나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이 기관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장애 자녀들의 네트워크, 즉 개인별 관계 형성이다. 장애 자녀들의 안전과 안정된 삶은 그가 가지고 있는 친구와 친지, 이웃들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믿음에 따른 발상인데, 관계가 풍성할수록 안전하고 관계가 부족할수록 자녀의 삶은 취약할 것이란 생각이 깔렸다.
또 하나는 ‘안전하고 안정된 미래 설계’다. 이 요체는 자녀들의 안정된 삶을 위해 필요한 재정 문제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플랜은 이를 재정적 존엄성 또는 재정적 안전이라고 지칭했다.
플랜이 제시한 이런 비전은 어쩌면 “필요한 프로그램이나 서비스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앞서 “무엇이 행복한 삶이며, 이를 위한 핵심 요소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더 앞세우는 태도에서 온 게 아닐까도 싶다.
이런 플랜의 아이디어를 바탕 삼은 이 나라 특유의 장애인 복지 제도가 있는데, 바로 장애적금(RDSP)이다. 캐나다가 세계 최초로 도입한 이 적금은 등록장애인이라면 누구나 금융기관에서 개설할 수 있다. 장애인이 일정 금액을 납입하면 연방정부가 저축액의 최대 3배까지 지원을 해주는 강력한 재정계획이자 목돈마련 저축 수단이다.
예컨대, 9살짜리 딸이 있는 가족의 연 소득이 한화로 연봉 8600만원가량 미만이고 매년 150만원가량을 20년간 납입하면, 그 딸이 40살에 받는 금액은 3억5천만원에 이른다. 세금 이연 혜택과 복리 개념이 더해진 결과다. 이 사무총장은 캐나다의 이 제도를 통해 “국가와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이며,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실감했다”고 밝혔다.
히어앤나우는 이런 캐나다 장애인 복지 시스템의 큰 우산 아래서 한편으로는 플랜의 정신을 계승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캐나다에서 얼핏 살핀 이 나라 장애인 복지 제도, 그리고 플랜과 히어앤나우의 비전을 내 나름대로 정리하면, 장애인의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자산’이란 관계 형성과 ‘재정적 존엄성 보장’이란 통찰이 아닐까 싶다.
사람자산은 장애 자녀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일상의 조력자이며, 생의 한가운데 친절과 사랑을 느끼도록 해주는 안전장치일 것이며, 재정적 존엄성 보장은 안정적 주거와 일정 소득을 확보하게 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핵심 수단일 것이다. 이는 비단 장애 자녀만이 아닌, 그 부모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행복한 삶’의 핵심 요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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