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예술박물관(HAM)에서 열린 ‘봄 목장으로’라는 전시를 관객들이 관람하는 모습. 전시는 2024년 1월까지 열린다. 사진 신하경
[크리틱] 강혜승 |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곧 어린이 꼬리표를 뗄 딸아이와 지난주 핀란드를 다녀왔다. 아이와의 핀란드 여행은 더는 미룰 수 없는 버킷리스트였다. 부모가 막 됐을 무렵 출장차 홀로 핀란드를 방문했다. 당시 헬싱키에서 보낸 며칠의 경험은 한 아이를 책임지는 어른으로서 세상을 달리 보게 된 계기가 됐다. 당연한 줄 알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상상의 경계도 보게 됐다. 그때 다짐했다. 아이가 제 발로 여행할 만큼 자라면 일상에서 어른의 눈높이로 배제되지 않는 경험을 꼭 하게 하리라.
8년 가까이 된 기억이지만, 헬싱키의 키아스마 현대미술관에서였다. 커다란 설치 작품 앞에 어린이용 발판이 놓여있었다. 어린이 관객을 염두에 둔 배려가 세심하다고 생각했다. 근처 아테네움 미술관으로 옮겼다. 국립박물관 격의 성격이라 분위기는 무거웠다. 마침 작품에 손을 대려는 아이가 제지를 받았고, 아이는 직원에게 왜 안 되냐고 물었다. 직원은 200년 전에 그려진 한점 작품이라고 설명하며 다른 쪽을 가리켰다. 만져도 된다는 표식이 있는 벽에 울퉁불퉁한 회화면이 궁금한 관객을 위한 모형이 걸려 있었다.
두 곳 미술관에서 어린이는 단지 통제 대상이 아니었다. 어른과 동격의 관객이었다. 지켜야 할 에티켓을 요구받았지만, 경험을 제한받지는 않았다. 다시 보니 일상에서 작은 차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모차가 쉽게 버스에 타고내렸고, 공공장소마다 유모차 주차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유모차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어른은 교통료를 면제받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슈퍼마켓에는 어린이가 직접 끌 수 있는 미니 쇼핑카트가 어른용과 나란히 비치돼 있었다. 넓은 공항이 버거울 어린이들이 타는 카트도 출국길에 볼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아이와 함께 하는 일상 곳곳에서 장벽을 느꼈다. 유모차는 언감생심, 한팔로 아이를 안고 다른 팔로 교통카드를 찍으며 곡예 타듯 버스에 오르곤 했다. 핀란드가 정책적으로 아이를 동반한 어른에게 교통비를 받지 않는 건 그 찰나의 안전 때문임을 절감했다. 공중화장실에서 아이가 손을 씻을 때는 또 어떤가. 아이용으로 세면대를 따로 둔 화장실이 많지만, 어른용을 단지 낮게 설치한 탓에 아이는 까치발을 들고도 수도꼭지에 손이 닿지 않았다. 아이는 다리만 짧은 게 아니라 팔도 짧다. 그래서 늘 안아 올려 씻겨야 했다.
그런 유아기를 졸업한 딸과 핀란드행 비행기에 오르며 설렜다. 도착 첫날 사우나를 이용하기에 앞서 어린이와 동행해도 되는지 문의했다. 성인시설이지만 어른 동반이라면 환영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짧은 여정에 이틀 연속 머문 곳은 중앙도서관이었다. 벽 없는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들 사이에서 책에 빠지거나 놀이에 빠졌다. 내 아이는 보드게임이 가득한 도서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 한잔과 함께 소곤소곤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그곳은 정숙을 요하는 엄숙한 공간이 아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지만 경계가 사라지자 특별해졌다.
헬싱키예술박물관에서 기획한 ‘봄 목장으로’라는 전시를 보며 이번엔 내 눈이 커졌다. 봄을 닮은 초록 길을 따라 동화와 현실을 오가는 초현실적 작품들이 펼쳐졌다. 핀란드에서 나고 자란 작가들 특유의 감성을 느끼던 중 이내 불편함을 느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나는 점점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문득 전시공간을 다시 둘러봤다. 아뿔사. 작품이 모두 어른 허리춤에 걸려 있었다.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는 어른들 눈높이의 세상에서 내내 답답했을 아이들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