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루언서 알록 베이드-메논은 제모하지 않은 몸과 화려한 패션과 화장으로 성별이분법과 인종의 경계에 도전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무서울 때나 추울 때 닭살이 돋는 건 진화하다 남은 버릇 같은 것이다. 체온을 유지하려고 피부 모낭(털 구멍) 옆 근육이 수축해 모간(털 줄기)을 위로 바짝 당기면서 털 사이의 공기층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지만, 사실 의미 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 털엔 체온조절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인류는 일찌감치 털을 포기하고 체열을 방출하면서 뇌를 시원하게 유지하는 쪽을 선택했다.
인간을 가리켜 ‘털 없는 원숭이’라고도 한다. 사실은 손·발바닥, 입술, 항문, 성기 등을 제외한 모든 피부에 털이 있다. 인간은 두피에 약 10만개, 몸에 약 500만개의 모낭을 갖고 있다. 모낭은 성별에 따른 차이가 없고 새로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인류는 우주를 탐사하듯 열정적으로 모낭을 파고들어 탈모방지 기술을 연구해왔지만, 비밀의 문은 호락호락 열리지 않고 있다. 그 대신 몸 털을 없애는 제모기술만큼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다수의 문화권이 체모에 관대하지 않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짐승처럼 굵고 검은 털이 수북한 사람을 음탕하다고 분류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털이 많은 게르만족을 바바리안(Barbarian)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고 두려워했다. 바바리안은 수염을 뜻하는 라틴어 Bart에서 왔다. 서구는 털이 수북할수록 자연에 가깝고, 더 동물적이며 지성과 거리가 먼 쪽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혁명적 좌파 남성들은 수염을 사랑했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호찌민은 수염을 길렀다.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같은 게릴라 전사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수염 깎을 시간이나 도구가 없어 털보 좌파가 되었다. 카스트로는 면도시간 15분을 아끼면 1년에 10일을 절약할 수 있고 그 시간에 독서와 운동을 해서 혁명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기자와 인터뷰하면서는 수염을 기른 까닭은 질레트 면도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농반진반 답했다. 이유가 어떻든 매끈한 얼굴을 한 좌파는 게릴라의 종말을 의미했다. (‘털: 수염과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본 체모의 문화사’ 참고)
젊은 시절의 피델 카스트로. 1950년대 촬영. 위키미디어 코먼스
남자의 털은 때론 전사의 용맹함과 저항의 상징이곤 했지만, 여자의 털은 곧바로 동물성과 연결되었다. 1834년 멕시코에서 태어난 여성 훌리아 파스트라나는 좋은 머리에 스페인어와 영어를 구사했지만 다모증 때문에 동물처럼 살았다. ‘곰 인간’ ‘원숭이 인간’ 등으로 불린 파스트라나는 세계를 떠돌며 공연했다. 폭력과 학대로 점철된 생이었으며 죽어서도 영면하지 못했다. 모스크바에서 객사한 파스트라나는 태어나서 며칠 만에 죽은 자신의 아기 주검과 함께 방부처리돼 5년 동안 전시된 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으로 보내졌다. 그의 사정이 알려지며 2013년 유해 귀환 운동이 벌어졌고, 153년 만에야 고국 멕시코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파스트라나가 살았던 19세기는 진화론이 탄생하고 유전법칙이 발견되면서 체모를 인종분류 기준으로 삼게 된 시기였다. 당시 변호사이자 포유류 털 컬렉터였던 피터 브라운은 털로 인종을 분류하는 ‘포유류 분류학’을 썼다. 찰스 다윈은 호모 사피엔스가 털 없는 여자를 성적으로 선호했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털이 적을수록 문명인에 가깝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고, 제모는 문명화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털 없는 사람을 순결하고 고귀한 신분으로 여겼다. 그리스시대 여성들은 등잔불로 다리털을 지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1920년대 이전까지 여성 제모는 그다지 대중적인 규범은 아니었다. 1930년대 이후 미디어는 여성의 제모와 매끈한 피부를 이상형으로 강조했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연구하는 레베카 헤르직 미국 베이츠칼리지 교수는 인체 특정 부위, 특정 방식의 제모가 성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며 인종차별적인 기획이었다고 분석한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혼혈이 많아지고 인종 정체성 경계가 위협받자 미국 백인 남성들은 털 없는 여성과 가족을 이루려 했다. 비문명적인 과도한 체모는 유전되는 것이라 생각해 털 많은 여성을 기피한 것이다. 백인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남성들의 가부장적 욕망과 상업적 요구가 결합하며 제모는 일반화했고 털 제거 기술을 발달시킨 과학적 진보는 계급상승의 꿈을 부추겼다. 그런 제모 산업의 가장 적극적인 소비층은 저소득 여성들이었다.
일반 여성들도 모르지 않았다. 1972년 7월 ‘미즈’ 창간호는 ‘체모: 마지막 개척지’라는 기사를 실었다. 경제적 자유와 성적 해방을 외치던 제2물결 페미니스트들은 제모 강요가 여성을 순결한 존재로 고정시키고, 본능을 거부하게 만드는 문화적 집착이라고 비판했다. 돈, 시간, 에너지가 필요한 제모 문화는 털 난 여성의 몸 자체를 근본적으로 더러운 것이라고 암시한다며 반발했다. 베티 프리단 같은 또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비판이 비생산적이라고 반박했다. ‘털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페미니스트 의제를 분산시켜 여성들의 직업과 육아보조금 같은 제도 투쟁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얘기였다. 또 페미니스트가 ‘못생기고 털 많은 남성 혐오주의자’라는 인식을 만드는 데도 일조한다고 보았다.
2017년 7월1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2회 천하제일 겨털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겨드랑이털을 뽐내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2015~2016년 세계적으로 ‘겨털 노출’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2016년부터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이 겨드랑이털을 자랑하는 천하제일겨털대회를 열었다. 여성 제모를 둘러싼 사회적 집착을 고발하며 금기에 도전하는 행사였다. 비슷한 시기 다른 나라에서도 범세계적인 ‘겨털 해방운동’이 벌어졌다. 다채로운 색으로 겨드랑이털을 물들이거나 반짝이를 붙이고 겨드랑이를 활짝 열어젖힌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여성들이 세계 각국에서 출몰했다. 이들은 여성의 겨드랑이털을 자연스럽고도 새로운 패션의 영역까지 끌어올리려 했다.
오늘날 체모와 패션에 관한 의제를 가장 도전적으로 수정하는 이들은 트랜스젠더, 드래그 아티스트들이다. 1959년 빌리 와일더 감독은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여장한 남성 배우들의 다리털을 밀었지만, 여성성을 과장되게 드러내는 이 시대의 다수 드래그 퀸들은 굵고 두꺼운 체모를 유지한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 패션쇼 런웨이에 설 정도로 주류 패션계에 영향력이 큰 메가 인플루언서이자 미국 논바이너리 작가인 알록 베이드-메논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말레이시아계와 인도 펀자브계 출신 엘리트 이민자 부모 밑에서 태어난 메논은 스탠퍼드 대학에서 여성학을 전공했다. 그는 성별이분법과 무관한 파격적인 패션을 선보였고 2015년부터 인스타그램 활동을 시작하며 해시태그(#nothingwronghair, 털은 문제 없어) 운동을 벌였다. 수북한 가슴털과 겨드랑이털을 보여주는 파인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고 짙은 화장을 한 그는 백인 중심적인 인종차별과 이분법적 성별관념에 저항한다. 학자들을 인터뷰하고, 패션쇼 무대에 서면서 메논은 제모가 비위생적인 혐오와 관련된 문제라기보다는 인종차별적인 문화제도라는 데 핵심이 있다고 주장했다.
동양 여성은 백인 여성보다 털이 적음에도 제모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을 그 못지않게 받는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언론은 여름철만 되면 털을 관리하라는 기사를 쏟아냈고, 제모는 이제 한국 여성의 필수 에티켓으로 자리 잡았다. 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여성은 비위생적이고 청결하지 못하며 동물적인 냄새를 피우는 더러운 여성이라는 관념도 강력하다. 최근 어느 왁싱숍에서 질염이 있어 예약을 취소하겠다는 여성에게 숍 주인이 토가 쏠린다며 원색적인 욕설을 퍼부어 수치심을 주면서 논란이 된 사건도 이와 관련해 볼 수 있다. 미국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동물적인 냄새와 지저분함이 ‘혐오’에 담긴 핵심적인 사고라고 말했다. 겨드랑이털과 음모가 악취를 퍼트린다는 믿음은 굳세다. 한국 여성에게 제모는 미국처럼 계급적이지만 여전히 비위생적인 혐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혐오를 낙후시키는 도전은 이어졌다. 영화 ‘러브픽션’(2012, 감독 전계수)은 여성의 겨드랑이털이 중요한 컨셉이었다. 그보다 좀 더 나아간 독립영화 ‘털보’(2019, 감독 강물결)는 자기 몸에 난 털과 털 많은 여자친구를 부끄러워하던 청소년 여성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뤄 호평받았다. 두 영화 모두 겨드랑이털 노출신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성공적으로 제작됐다. 오늘날 패션잡지 ‘보그’는 표지 화보에 제모하지 않은 여성의 사진을 싣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겨드랑이털은 돌아왔다’고 2022년 선포했다. 이젠 나라 안팎의 많은 여성이 ‘제모는 선택’이라 말한다. 끝내 인간 몸 털의 다양성도 아무렇지 않게 인정받는 시대가 올까. 누구나 활개 펴듯 털이 있는 겨드랑이를 활짝 펼칠 때가.
이유진 | <한겨레21> 선임기자
한겨레 편집국 문화부, 편집부, 사회부 기자를 거쳐 책지성팀장과 토요판 부장을 지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문화학을 공부했고 감염병과 주부주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가 있고, <엄마도 아프다> <종이약국>을 다른 필자들과 함께 썼다. ‘바디올로지’는 ‘몸(body)’과 ‘학(-logy)’의 합성어로, 지난 100년 동안 미디어를 통해 유포된 몸 담론을 씨앗으로 전쟁터나 다름없는 몸과 젠더, 장애, 노화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frog@hani.co.kr
방부처리된 훌리아 파스트라나의 시신 목판화. 위키미디어 코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