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동 흉기 난동 사건’ 현장을 찾은 한 시민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한겨레 프리즘] 허윤희 | 전국팀장
“요즘 부고 뉴스만 보는 것 같아.”
한 지인이 요새 뉴스 보는 게 두렵다며 한 말이다. 최근 몇주 새 충북 오송 지하차도 참사, 신림역과 서현역 무차별 범죄 등 애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기사들이 연달아 나왔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원인과 문제로 발생했지만, 죄 없는 이들의 죽음을 뉴스를 통해 계속 보아야 하는 잔인한 여름이다.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사건과 사고에 관한 현장 기사들을 보도하기 전 살피는 게 주요한 내 업무 중 하나인데, 기사에 적힌 사망자 숫자는 수시로 변한다. 기사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지만, 빠르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일단 기사를 내보낸 뒤 추가로 업그레이드하게 된다. 마감에 쫓기며 사망자는 하나, 둘, 셋… 단순한 숫자로 정리되고 반영된다. 그런 날, 하루의 끝은 쓰디쓰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오늘 참 많이 무뎌진 삶을 살았구나.
그럴 때면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친구가 떠오른다. 2년 전 그의 죽음은 원고지 2~3매 분량의 짧은 인터넷뉴스로 보도됐다. 차가운 사실관계만 나열된 그 기사의 주어는 40대 ㄱ씨. 나와 같은 해, 같은 달에 결혼했던 그를 15년 넘게 알고 지냈다. 동갑이었던 우리는 각자의 배우자 덕분에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다. 인생의 파도를 넘으며 서로를 지켜본 우리. 맑고 따뜻한 사람이었던 그는 어느 때고 내 푸념과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언제나 내 편이던 그 친구와 함께 늙어갈 줄 알았지만 섣부른 기대였다.
그는 안타깝게 떠나갔지만, 그의 가족은 그의 부재와 상실을 안고 살아간다. 뉴스는 단발성으로 끝나지만, 남겨진 이들의 삶은 계속된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삶, 사랑하는 이의 부재로 인해 가슴 절절히 느껴야 하는 고통스러운 감정들…. 그의 죽음이 남긴 흔적과 의미를 찾으며 여기 이곳에 살아남은 이들은 여기 이곳에 없는 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하지만 무감각한 사회에서는 그들의 삶을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을 자신과 분리하고 타자화한다. 누군가의 죽음은 전시되고 소비될 뿐이다. 요즘엔 사건 현장이 고스란히 찍힌 폐회로텔레비전(CCTV) 영상이 무분별하게 퍼진다. 특히 소셜미디어(SNS)에서는 1분 이내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진 콘텐츠인 ‘숏폼’을 통해 잔혹한 범행 장면이 여과 없이 퍼져나간다. 지난달 21일 발생한 ‘신림역 흉기 난동’ 사건 현장 폐회로텔레비전 영상도 그렇게 인터넷을 떠돌았다. 어느덧 끔찍한 사건이나 재난 현장의 영상을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돼버린 것이다. 이런 것들이 피해자와 유족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은 간단히 무시되고.
예술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수전 손태그는 ‘타인의 고통’에서, 폭력이나 잔혹함이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대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한다고 지적한다.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과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향해 연민의 시선만 보내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무고함까지 증명해주는 알리바이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이겨내고, 잔혹한 이미지에 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손태그가 건넨 말이 생각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해석에 반대한다’) 감성을 회복한 인간 사이의 공명은 우리를 달라지게 한다. 하지만 사회적 공명의 부재는 우리 인간을 위기에 빠뜨리며 아프게 한다. 펄펄 끓는 잔혹한 여름, 읊조린다. 무력해지지 않고 무뎌지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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