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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다는 것의 물렁함

등록 2023-07-31 19:11수정 2023-08-01 02:39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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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한국사회] 이광이 | 잡글 쓰는 작가

보이스피싱 예방 교육을 다니는 강사가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아침에 깨어보니 남도에서 김치공장을 하는 선배로부터 문자가 들어와 있다. 어느 에너지 관련 공사의 40주년 기념 이벤트다. 간단한 오엑스(○×) 문제를 풀고 들어가니, 이 소식을 20명에게 널리 알리면 추첨을 통해 100만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이 선배는 전에 비싼 참치회를 사줘서 상당한 신뢰가 있던 터에 또 이런 호의를 베풀었구나 하고 기뻐하며, 나도 낫낫한 에스엔에스(SNS) 친구를 골라 보내기 시작했다. 지정한 숫자를 다 채우니 3단계로 무슨 앱을 다운받으라 한다. 이 대목부터 자꾸 틀려 딸을 불렀다. 그리고 내 신상을 기입하여 회원으로 가입하고, 돈을 받을 계좌번호를 입력하고 있는데, “잠깐!” 하면서 딸이 개입한다. “아빠,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그런 거 있어, 돈 받으면 너도 좀 주께.” 그런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 딸이 금방 검색한 그 공사 홈페이지를 보여준다. “이벤트 하는 거 없는데, 40주년도 아니야! 아빠, 낚인 거 같은데….” “아니야, 이거는 소수에게만 혜택을 주는 거라고…” 하다가 그제야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순간 당황했다. ‘아! 넘어갔구나, 공돈에 눈이 멀어….’ 그렇게 깨달았을 때, 딸은 내 휴대폰을 뺏어 내가 보낸 문자를 취소·삭제하고 있다. 보리 이삭을 얼굴에 문대는 것같이 까슬까슬한 부끄러움이 온몸에 쏟아지는 아침이었다.

선불교의 공안집 ‘무문관’에 조주와 두 암자 얘기가 나온다. 조주는 당대의 선승으로 ‘고불’(古佛, 덕이 높은 스님)로 불릴 만큼 이름이 높았다. 날은 저물어 하룻밤 얻어 잘까 하고 어느 암자를 찾아간다. 암주가 다짜고짜 주먹감자를 내보인다. ‘객승에게 내줄 방이 어디 있나’ 하는 뜻의 손으로 하는 욕이다. 조주는 대거리를 해주고 싶지만 참는다. ‘물이 얕아서 큰 배를 정박할 수 없는 곳이로군!’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다른 암자를 찾아 떠난다. 그러나 걸으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내 마음이 이미 흔들렸다는 것을. 이 큰 배가 저 얕은 물에 흔들렸구나, 화가 안 나는 것이 아니라, 화를 참고 있는 자신을. 두번째 암자를 찾아간다. 거기서도 똑같은 일을 당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주먹감자를 보고는 받아들인다. “당신은 뭔가를 줄 수도 뺏을 수도 있고, 나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면서 넙죽 큰절을 올린다. 나그네가 하룻밤 얻어 자려면 큰절을 올려야지, 돌덩어리에는 108배를 하면서 하룻밤 재워줄 스님에게 삼배를 못 할 것이 무엇인가. 화를 참는 것이 아니라 화가 안 나는 것이다. 본래 마음을 되찾고 있다. 첫 마음은 타인이 쳐 놓은 그물에 걸리지만, 두번째 마음은 자유롭게 그물을 벗어난다.

칠흑 같은 밤에 번개가 치기 전의 어둠과 번개가 친 뒤의 어둠은 다르다는 헤르만 헤세의 두개의 어둠,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것을 내려갈 때 보았다는 고은의 그 꽃,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로 회향하는 성철의 그 산과 물, 그리고 달라진 나로 돌아오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그 ‘복’ 자가, 두번째 암자에 이르렀을 때 쓰는 다 같은 말이다.

나는 한 갑자를 돌아 생의 만추를 지나면서 어느 정도 무르익었거니 하였다. 첫 암자를 지나 두번째 암자를 향해 가고 있는 길이라고 남몰래 자신했으므로, 그 공돈에 홀라당 털린 나를 돌아보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딸이 허망해하는 나에게 “아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래도 안 털렸잖아” 하고 위안을 건넨다. “그래, 고맙다. 많이 컸네” 하고 대꾸는 했지만, 밑천 달리는 사람이 노름판에서 쉬 맨얼굴을 드러내듯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읽고 쓰고, 가끔 명상도 하고, 어디 가서 아는 척도 하고 다녔는데,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이토록 물렁한 것이었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부위가 벌에 쏘인 것처럼 슬슬 부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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