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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빨간 해병대가 떠내려간다”

등록 2023-07-26 18:10수정 2023-07-27 17:56

해병대원과 소방이 지난 19일 오전 경북 예천군 일대에서 수색 중 급류에 휩쓸려 실종된 해병대 전우를 찾고 있다. 연합뉴스
해병대원과 소방이 지난 19일 오전 경북 예천군 일대에서 수색 중 급류에 휩쓸려 실종된 해병대 전우를 찾고 있다. 연합뉴스

[뉴스룸에서] 이세영 | 전국부장

그저 부대 밖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위병소 너머 ‘사제' 세계는 공기 냄새부터 달랐다. 자유의 냄새였다.

“인마, 좋지? 교육훈련 열외에 고참 눈치 안 봐도 되고. 거기 사장한테 잘 보여야 돼. 지난번 다녀온 놈들한텐 백숙에 과일주까지 내줬대드라.”

지역 토박이인 행정보급관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말했다. 세살 어린 중대 보급계와 함께 행정보급관이 모는 흰색 승용차에 올랐다. 농촌서 태어나 공고를 졸업한 뒤 인천에서 새시(창틀) 공장을 다니다 군에 왔다는 보급계는 낫질·삽질은 물론 목공에 용접까지 못 하는 일이 없었다. 20분쯤 지나 차가 우리를 내려놓은 곳은 무슨 무슨 ‘가든’ 간판을 건 산 아래 음식점이었다.

출영의 공식 명분은 ‘수해복구 대민지원 활동’이었다. 중대 막사를 나서기 전 인사서무계는 부대원 현황판에 “열외 2”라고 쓴 뒤 그 옆 ‘비고’ 칸에 각 잡힌 차트 글씨로 ‘대민지원(수해복구)’이라고 써넣었다. 그러나 그날 하루 우리가 한 일은 망가진 하우스 골조와 폐비닐을 치우고, 담장 옆 잡초를 정리하고, 새것으로 교체할 홀과 주방의 집기들을 대문 밖까지 옮겨 놓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아무리 가져다 붙여도 수해복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처삼촌 묘 벌초하듯 건성으로 일하는 본새가 사장 성에 안 찼던지, 점심으로 백숙에 과일주 대신 두부김치와 막걸리가 나왔다.

그날 일은 내가 군 생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여한 대민지원 활동이었다. 얼마 뒤 소대장이 귀띔했다. “너 알아? 저번에 대민 봉사 갔던 가든 사장이 행보관 친구란 거. 행보관 그 새낀 매사가 그런 식이야.” 소대장 말이 맞는다면, 우리는 대민지원을 빙자한 부대 간부의 ‘개인 사역’에 동원된 것이었다.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지만 묻어두기로 했다. 공연히 문제 삼았다간 1년 반도 더 남은 내 군 생활만 고달파질 것 같았다.

27년 전 그 이상했던 ‘수해복구 사역’을 떠올린 건 지난 17일 경북 예천에서 있었던 한 해병대원의 안타까운 죽음 때문이다. 지반이 약하고 물살이 거세 숙련된 구조대원조차 장비 없인 들어가지 않았다는 내성천 모래 강물이었다. 삽 한 자루 달랑 든 병사들을 허리 깊이까지 밀어 넣어 실종자를 찾게 한다는 발상은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것일까. 심지어 그들에겐 구명조끼조차 없었다.

사고 전 현장 부대에 전파됐다는 사단장 지시사항은 믿기 힘들 정도다. “해병대 소속이 확 드러나도록 적색티를 입고 작업할 것, 경례 잘하도록 부대장은 현장 지휘를 똑바로 할 것.” 이게 사실이라면 대한민국 해병대는 해체돼야 옳다. 병사들 안전보다 부대의 평판과 성과, 상급 지휘관에 대한 의전이 우선인 군대가 어떻게 민주공화국의 군대일 수 있는가.

그날의 위험을 무릅쓴 병사들에게 약속된 건 실종자 발견 때 주어진다는 14박15일 포상휴가였다고 한다. ‘첨단 강군’을 자처하는 한국군 지휘관들 머릿속에, 병사들은 그저 바깥공기 쏘여주며 사제 음식 먹이고, 돈 안 드는 휴가증 몇장 쥐여주면 그만인, 값싸고 순종적인 ‘졸(卒)들’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자원과 인력이 군에 집중되고, 시민 저항을 억누르는 데 군의 물리력이 수시로 동원되던 시절엔 ‘독재의 주구’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누그러뜨릴 수단이 군에는 절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군의 대민 봉사는 이미지 순화나 공공의 수요에 부응하는 차원을 넘어 지휘관의 평판과 고과를 높여주는 합법적 민사 작전쯤으로 변질한 느낌이다. 그것이 27년 전 경험한 ‘가든 사역'과 다른 점을 나는 찾지 못하겠다.

물론 수시화·대형화하는 재난 앞에서 경찰과 소방 같은 전통적 안전 기구만으론 대처가 버거운 게 사실이다. 공동체의 시련 앞에서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을 보유한 국가 조직을 놀리는 것도 그다지 합리적이진 않다. 중요한 건 기준과 원칙이다. 사고 수습과 구조 활동에 전담 부대와 숙련 인력을 투입하는 것에 누가 토를 달겠는가.

“빨간 해병대가 떠내려간다.” 해병대원 실종 당일 예천의 119 상황실에 접수됐다는 신고 전화다. 하지만 그날 급류에 휩쓸린 게 적색티를 입은 병사들뿐일까. 내성천 모래 강물에 떠내려간 건 국가의 염치, 공화국의 양심이었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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