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손재권 | 더밀크 대표
“금세기 최고의 영화 중 하나다. 올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다면 바로 이 영화다.”
미국 전역이 모처럼 ‘극장 개봉’ 영화에 열광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등 스트리밍서비스가 미디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극장 관람’ 열풍이 불고 있는 것.
바로 지난 21일(현지시각) 미국 전역에서 동시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다. 개봉하자마자 ‘전율이 일었다’ ‘흐느껴 울었다’는 관객 평가가 줄을 이었다. 올해 박스오피스 개봉작 신기록을 세울 것으로 예상한다. 그동안 넷플릭스 등에 눌려 부진을 면치 못했던 ‘영화적 경험’이 부활했다거나, 이 영화의 메시지와 연기자들의 훌륭한 연기에 대한 이야기 등도 앞으로 많이 언급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개봉한 21일, 미 백악관과 오픈에이아이(AI),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아마존, 앤트로픽, 인플렉션 등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 개발 7개 기업이 ‘인공지능 위험관리와 관련한 자율규제안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이 합의는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평가하는 ‘오펜하이머 순간(모멘트)’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오펜하이머는 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정부의 핵무기 개발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핵무기 개발 이론기술 분야 최고책임자였다. 하지만 자신이 주도해 개발한 핵무기가 실전에 투입(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투하)되고 그 참상이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는 핵무기 회의론자로 돌아서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실제로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며 자책했다. 그는 수소폭탄 등으로 기술개발이 번지는 것을 막고자 했으나 당시 불어닥친 매카시즘 광풍의 희생양이 됐다. 영화는 이 실험과 깨달음의 순간을 그렸다. 이후 ‘오펜하이머 모멘트’는 새로운 기술로 의도치 않은 결과가 초래되면 과학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돌아봐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인공지능이 ‘핵 개발’ 맨해튼 프로젝트와 비견되는 이유는 개발 속도가 빠른데다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무서운 기술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현대 인공지능의 대부 중 한명으로 꼽히는 제프리 힌턴 교수, 전 구글 회장인 에릭 슈밋, 테슬라 최고경영자인 일론 머스크 등이 공통으로 “인공지능은 핵무기처럼 다뤄야 한다”고 입을 모은 이유다. 인공지능의 개발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져 어디까지 갈지 ‘인간’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오픈에이아이 등 인공지능 대표 기술기업들은 정부와 합의를 시도하려 했다. 이번 합의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차별적 행위’를 우선 연구하고 외부감사도 진행하기로 했다. 또 사회적 위험을 조장하거나 국가안보 문제를 유발하는 인공지능 모델은 회사 내외부에서 레드팀을 구성하고, 오디오 또는 시각적 콘텐츠가 인공지능으로 생성됐는지를 사용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워터마크’를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이번 합의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리눅스로 유명한 오픈소스 기반 솔루션 제공기업 레드햇(Red Hat)의 피터 로빈슨 수석연구원은 “실제 이 합의를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라고 반문했다. 이번 합의안이 되레 행정부나 의회가 인공지능 규제 시기를 늦추거나 규제안 내용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도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만든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영화와 인공지능 기술 개발의 상관관계를 떠올리며 “실리콘밸리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책임’에 대해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단순한 흥행작을 넘어 기술과 산업, 그리고 정치사회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