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한국사회] 손자영 | 자립준비청년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지낼 때 생일이 별로 반갑지 않았다. 내가 자란 시설에서는 매년 단체 생일파티로 개개인의 생일파티를 퉁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자라면서 친구들과 오직 나만을 위한 생일파티도 열면서 점차 생일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초코파이로 만든 3단 케이크에 촛불도 꽂고, 갖고 싶다고 한달 전부터 노래 부르던 선물도 받고, 친구들이 쓴 손편지를 읽어보기도 했다. 매일 만나는 친구들이 써준 편지라 좀 어색했지만 읽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얼마 전 맞이한 생일 때도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를 보관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받아온 편지들을 고이 모아둔 보관함을 오랜만에 열었다.
‘너의 생일에, 엄마가.’
초등학교 6학년, 나를 1년간 키워준 양육자(보육시설 선생님)가 써준 편지였다. 옛 편지를 읽으니 그의 주름 가득한 얼굴과 따듯했던 입김이 떠올랐다. 사춘기 시절 해마다 바뀌는 양육자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불안했고, 방황했다. 그런 나와 친구들에게 그 선생님은 매일 밤 귓속말을 해줬다. “오늘 설거지 도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엄마는 힘이 났어”, “태어나줘서 고맙다, 생일 축하한다”, “사랑해”. 처음에는 그 귓속말이 부끄러웠다. 따듯한 사랑이 낯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매일 밤 3분 남짓 짧은 귓속말을 기다리게 됐다. 그의 다정했던 귓속말과 따듯했던 입김은 여전히 내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너의 꿈을 응원하는 선생님이.’
중학교 2학년부터 4년 동안 내게 영어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이 써준 편지였다. 처음 선생님을 만났을 때 한 친구가 대뜸 물었다. “선생님은 언제까지 봉사활동하실 거예요? 다들 잠깐만 하고 그만두던데….” 우리 모두 궁금해하던 질문이었다. 선생님은 잠시 놀란 표정을 보이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친구들이 보육원을 나가기 전까지 계속 올 거예요. 대신에 여러분도 숙제 잘해야 해요.” 나는 가끔 숙제를 안 해 잔소리를 듣고 몰래 수업을 빠지기도 했지만, 결국엔 다시 선생님 옆으로 돌아갔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배운 것은 영어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따듯한 어른도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너의 자립을 축하하는 이모가.’
고등학교 3학년, 보육원 시절 마지막 양육자였던 분이 자립을 앞둔 내게 써준 편지를 꺼냈다. 걱정과 응원의 말들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자립을 앞두고 짐을 정리하던 내게 그 선생님은 꼭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미역국 끓이는 법’이었다. “엥? 갑자기 미역국이요?” 귀찮아하는 내게, 선생님은 “혼자 살면 국 하나 정도는 끓일 수 있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게 나는 그날 미역국 만드는 법을 배웠다. ‘미역을 불리고, 참기름을 두르고, 볶고, 육수를 넣고,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하고, 푹 끓이기. 그리고 미역국은 끓이면 끓일수록 맛있다.’ 이모 덕분에 소중한 요리법을 하나 알게 됐다. 예상대로 자립한 뒤 한동안은 미역국만 엄청 끓여 먹었다. 할 수 있는 요리가 그것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자립을 시작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결정해야 했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곤 했다. 대신에 힘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건, 그간 만났던 좋은 어른들과 그들이 내게 안겨준 따뜻한 기억들 덕분이었다. 내 곁에 있어준 어른들의 존재가 나를 살게 한 것처럼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위해 존재할 차례다. 여전히 사회에는 매년 자립준비청년들이 나오고 있고, 그들에게도 온기를 전해줄 어른은 필요하다. 자립을 앞두고 혹은 자립을 시작하고 홀로 떨고 있을 자립준비청년들에게 내가 어른들에게 받았던 따뜻함을 그대로 전할 수 있도록 그들 곁에 서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