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본부에서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코즈모폴리턴] 신기섭 |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인권과 자유 측면에서 세계의 ‘우등생’으로 여겨지는 유럽연합(EU)이 언론 자유 보장법 제정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법을 만들 만큼 언론 자유를 더 강하게 보호해야 한다고 느끼다니, 이래서 유럽연합이 자유 수호의 우등생일까’ 싶었다. 그런데 논의 과정에서 법안 내용이 바뀌는 걸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9월 언론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유럽 언론 자유법’(EMFA) 제정을 처음 제안했다. 집행위원회의 법안 초안은 언론인 구금, 감시, 압수수색 등을 안보 등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언론인이 사용하는 정보기기에 감시 소프트웨어(스파이웨어)를 사용하는 걸 엄격히 제한했다. 이는 2021년 7월 전세계 언론의 공동 취재를 통해 이스라엘산 스파이웨어 페가수스가 세계 곳곳에서 정치인과 언론인 감시에 쓰이고 있음이 확인된 뒤 나온 대응 조처다.
하지만 지난달 20일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스파이웨어를 사용할 수 있는 범위를 원안보다 크게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테러, 반인륜 범죄, 아동 성착취물 등 중대 범죄 수사에서 3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32가지 범죄 수사로 확대한 것이다.
이런 후퇴를 앞장서 주장한 나라가 프랑스라는 것도 놀랍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페가수스의 공격을 당했을 가능성 때문에 휴대전화기를 바꿨으면서도 언론인 감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온라인 정치 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는 지난 5월 안보와 국방을 위한 회원국들의 권한을 보호하는 “명시적이고 무조건적인” 조항 추가를 처음 요구했다. 그리고 결국 회원국들은 언론인 감시 금지 조항이 “회원국의 국가 안보 보장 책임을 저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법안에 분명히 하기로 했다.
국제 언론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는 즉각 반발했다. 이 단체는 성명을 내어 “포괄적인 국가 안보를 위한 예외 인정은 잘 봐준다면 큰 실수이고 가장 나쁘게 본다면 언론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라며 변경된 법안 철회를 촉구했다. 유럽연합의 입법기관에 해당하는 유럽의회에도 독소 조항 거부를 주문했다.
이런 언론 자유 후퇴는 신냉전 시대 유럽연합의 허약함을 보여준다. 이는 유럽연합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제재 차원에서 러시아 국영 방송 <러시아 투데이>(RT)를 차단하고, 유럽사법재판소(ECJ)가 이를 지지한 데서도 확인된다. 유럽사법재판소는 지난해 7월27일 이 방송 차단이 아무 문제 없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우크라이나 침략을 정당화하는 정보를 방송하는 것은 유럽연합의 공공질서와 안보에 중대하고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유럽의 언론 자유 신념에 비춰볼 때 나약한 후퇴로 느껴지는 지적이다. 게다가, 유럽연합의 공공질서와 안보가 러시아 방송의 선전 활동에 위협받을 만큼 불안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들은 이 체제의 우월성을 주장할 때 언론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투명성과 개방성을 내세우곤 한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라고 할 유럽연합조차 언론 자유 확대를 버거워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자유로운 언론이 민주주의를 지탱하지만 건강한 민주주의라야 언론의 자유를 지켜낼 수 있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안보’의 최대 위협 요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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