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언론 보도에서 ‘왜 이것이 논란일까’ 싶은 기사를 대하곤 한다. 예컨대 2021년 양궁 안산 선수 ‘페미 이슈’가 그랬다. 외신은 이를 ‘온라인 남용’(online abuse)으로 보도했지만 우리 언론은 ‘논란’이라 보도했다. 이것이 논란이 되려면 누군가의 정체성이 페미니스트인 게 왜 논란거리인지부터 답해야 하지만 이런 기본적 질문은 무시되고 젠더 갈등만 부각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연구논문, “‘논란’ 키워드로 본 뉴스 의제의 연성화와 정치화”(2023년 6월23일)가 나왔다. ‘논란이 아닌 것을 논란으로 만드는 언론’과 그 파장에 대한 연구다. 영어 표현으로는 ‘nontroversy’(논트로버시)로 ‘조작된, 만들어진 논란’(a manufactured, fabricated controversy)의 뜻이다. 왜 언론은 없는 논란을 논란으로 만드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디지털 언론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클릭 수’다. 문제는 어떤 언론이라도 이에 매달리게 되면 황색언론과 그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논문을 쓴 연구자들은 ‘논란 보도’의 문제점 둘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일방적 주장이나 의견을 부풀려서 논란을 만들어 낼 때 그 보도의 목적이 공공적 행위가 아니라 상업적 목적을 띤다. 둘째, 논란이라는 말 자체가 일방적이고 때로는 잘못된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해 온라인 폭력 피해자가 오히려 문제적 인물이 되며, 심지어 기본적 인권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논문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저널리즘에서 레거시 언론(인지도 있는 언론)마저 논란이라는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이 용어의 쓰임이 ‘제자리를 잃은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한다.
이런 부분이 언론 연구에서 지적된 게 처음은 아니다. 다섯 언론학자들이 쓴 <언론 자유의 역설과 저널리즘의 딜레마>(2023)에서도 유사한 문제를 지적한다. 연구자들은 “언론기관의 자유가 증진될수록 시민의 자유가 확장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언론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릴수록 “특히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향”이 나타난다며 이를 ‘언론자유의 제1역설’이라 명명한다. 언론이 만들어 낸 논란 속에 피해자들이 문제유발자가 되고 때로 기본적 인권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더하여 연구자들은 ‘언론자유의 제2역설’로 “억압하는 권력에는 자유를 헌납하고, 관용하는 주권자와 그 대행자에게는 자신의 자유를 남용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현장의 언론인들은 ‘헌납’과 ‘남용’이란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달리 표현해보면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권력 감시라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경향은 앞서 언급한 ‘논란’ 관련 논문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법안이나 제도, 교육, 노동, 사회 감시와 관련된 ‘논란’ 기사의 비율은 점점 줄어드는 데 반해 ‘차별과 혐오발언’을 논란으로 포장해 보도하는 비율은 급증했다. 연예인 발언이나 태도를 문제 삼아 ‘논란’이라 이름 붙인 기사의 수도 지난 30년 가파르게 늘었다. 언론이 공적인 문제보다는 사람들 이목을 끌 만한 사안을 논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보도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논란’ 논문이 지적하는 가장 뼈아픈 부분은 우리 언론이 공적인 논의를 통해 “해결 가능한 갈등보다 특정 발언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 그치는 갈등유발형 의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치와 이익이 그 어느 때보다 분화된 사회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다. 민주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렇게 분화된 가치와 이익을 명확히 확인하여 중재하고 조정하는 일이다. 언론의 기능은 권력이 이런 일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하여 알리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언론 역시 갈등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보장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론이 권력의 감시에서 멀어지고 사회문화 영역에서, 때로는 매우 사적인 영역에서까지 갈등유발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심지어 이런 일을 하는 가운데 피해자를 문제유발자로 만들기도 한다면 이 현실을 어떤 말로 변명할 수 있을까?
언론이 세상을 바로잡는 수단은 적확한 말이다. 그 적확한 말은 언론 자신을 스스로 바로잡는 수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