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운데)가 지난 14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연정 구성원인 크리스티안 린드너 재무장관(맨 왼쪽부터), 아날레나 베어보크 외교장관,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국방장관, 낸시 페저 내무장관과 함께 참석해 이날 발표한 국가안보전략 문서를 들고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베를린/로이터 연합뉴스
[특파원 칼럼] 노지원 | 베를린 특파원
독일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슈프레강을 사이에 두고 연방의회 의사당과 마주 보는 건물이 있다. 화려하지도,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 이 건물 통창에는 ‘연방기자협회’(Bundespressekonferenz)라는 하얀 글씨가 씌어 있다. 독일에서 일하는 기자라면 꼭 가게 되는 곳이다.
지난 14일(현지시각) 오전 11시. 올라프 숄츠 총리부터 연정 핵심 구성원인 외교·국방·재무·내무 장관이 연방기자협회 회견장으로 줄줄이 몰려나왔다.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펴낸 ‘국가안보전략’을 언론에 공개하고, 기자들이 던지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기자가 직접 사회를 봤다. 질문자 역시 진행을 맡은 기자가 호명했다. 정부 관계자가 아닌 언론인이 주도하는 기자회견이 우리에겐 어색하지만, 독일에선 당연한 일이다.
30분, 길어야 1시간 정도면 끝날 줄 알았던 이날 회견은 1시간 반이 지나서야 끝났다. 끝없이 이어지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 때문이었다. 취재 기자부터 사진·카메라 기자까지 백여명 언론인이 모인 가운데, 17명이 질문을 던졌고, 이 중 10명이 한두 차례씩 추가로 질문했다. 총리와 장관들은 30개 안팎의 ‘송곳 질문’ 앞에서 피할 곳이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답변을 내놔야 했다. 이 모든 광경은 취재진의 녹음기에, 카메라 영상에 담겨 신문 기사, 방송 뉴스로 시민들에게 전달됐다.
독일의 기자간담회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역사가 있다.
1949년이었다. 독일에서 의회를 취재하던 기자들은 정부는 물론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 각 분야 핵심 인사들을 불러다 묻고 따져 정확한 정보를 포괄적이고 빠르게 얻겠다는 취지로 연방기자협회를 만들었다. 나치 독일 시절 언론이 선전·선동과 여론 조작의 도구로 전락한 뼈아픈 경험이 있었기에, 기자들은 ‘독립성’을 제1원칙으로 삼았다. 스스로 협회를 조직해 회비를 걷고 그 자금으로 건물을 임대해 현재까지 운영하는 이유다. 총리·장관 등 정책 책임자들을 회견장에 불러 답하도록 했다. 누가, 어떤 주제에 관해 정보를 제공하게 할지도 기자들이 결정했다. 연방정부와 각 부처 대변인은 매주 월·수·금요일 기자가 주도하는 회견에 참석하고, 미처 못 한 답변은 추후 제출한다.
독일 정부가 국가안보전략을 내놓기 딱 일주일 앞서 한국 정부도 같은 문서를 발표했다. 국가안보실 1차장이 발표한 뒤 질의응답은 ‘백브리핑’으로 전환됐다. 카메라를 끄고 뒤(back)에서 이야기한다는 뜻의 백브리핑은 익명으로 보도된다. 정부는 상세히 설명해준다는 명분으로 실명 대신 관계자발로 기사를 쓰도록 요구하곤 한다. 그마저도 이날 백브리핑은 30분이 채 안 돼 끝났다. 언제나처럼 정부 관계자가 질문할 기자를 골랐고, 발언권을 얻은 기자는 5명에 그쳤다. 진짜 문제는 기자가 ‘손님’이 되는 이런 식의 회견이 한국에선 대단히 일반적이라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정권이 바뀌어도 언제나 비슷했다.
“민주적 공공 영역에서 자유롭고 비판적이며 독립적인 담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독일 연방기자협회가 강조하는 저널리즘의 원칙이 새삼 뼈아프게 다가온다. 기자들이 주도하지도, 필요한 만큼 물을 수도 없는 기자회견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연한 백브리핑이 보호하는 건 대체 누구고, 무엇일까.
z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