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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사법에 대한 존중이 무너져 내릴 때

등록 2023-06-25 18:48수정 2023-06-26 02:42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세상읽기]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법원이나 판사에 관해 흔히들 하는 착각이 ‘재판에는 정답이 있다’는 인식 같다. 하지만 법조인으로 살면서 정답이 있었던 적은 시험뿐이었던 것 같다. 실제 재판에 임하면 분명한 것이 없다. 사실인정 단계에서도 현장에 있지 않았던 제3자인 판사가 보기에 실체적 진실은 이것이라고 명쾌하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은 많지 않다. 법 해석 단계로 들어오면, 정답은 더더욱 사라진다. 축적된 선행 판례들과 연구 결과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법 해석 자체가 고정불변의 정답을 예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법 해석은 고정불변의 정답을 내놓을 수 없는 것일까. 하나의 이유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인식과 가치 자체가 고정불변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법은 그 사회의 작동 원리를 구성하기 때문에 사회와 동떨어져 존속할 수 없다. 한편, 시대의 변화, 과학의 발전, 문명의 진보로 말미암아 기존의 상식이 오류와 편견으로 재정의되거나 사람의 권리가 새로이 발견되는 상황은 계속 발생한다.

법이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법 해석 변경의 가능성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법에서도 법 해석은 계속하여 변화하고 있다. 대법원이 스스로 판례변경하는 것이 그 예인데, 대법원의 판례변경은 하급심들의 고민이 쌓이고 쌓였을 때 비로소 일어날 때가 많다는 점을 함께 고려하면 결국 하급심의 법 해석 단계에서도 선행 판례가 있는지 여부와 별도로 치열한 고민과 결단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많은 경우 기존 법리를 구체적 사안에 정교하게 적용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기어코 이를 변경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그때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고민한 적이 있다.

한 동료 판사에게 내 판단이 자의적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지 질문했다. 그는 일단 기존 법리를 정교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해주었다. 그렇게 이해한 상태에서 다른 결론을 도출해낸 자신의 법 해석이 타당한지 기존 법리와 비교하여 논증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논증에 성공한다면 상급심에서 파기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당하게 그 결론대로 재판하면 되는데, 더 중요한 점은 만일 자신이 봐도 논증에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자신의 결론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를 갖는 태도라고도. 마지막 말이 특히 인상 깊었다.

첨예한 사회적 쟁점이 형성되어 있던 재판에서 고민하던 와중에 다른 동료 판사에게 기존 법리와 다른 판단을 했을 때 소위 ‘튀는 판결’이라고 비난받거나 특정 정치성향에 따른 재판이라고 매도당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불안을 토로했다. 그 판사는 단호히 답변해주었다. 결론에 이르는 이유만 충실히 적시되어 있다면 그 결론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판단 자체는 존중받을 거라고, 판사 사회가 그 정도의 양식은 갖춘 곳이라고. 정작 나는 그 쟁점 사안에 대한 재판을 마치지 못하고 인사이동되었고, 몇년 뒤 대법원이 판례변경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지만, 아직도 그의 태도는 큰 힘이 된다.

법 해석에 고정불변의 정답은 없다지만, 이처럼 많은 판사들은 법을 해석할 때 치열하게 고민하고 책임질 각오로 결단한다. 노력 끝에 기존 법리를 계속 따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만일 기존 법리와 다른 법 해석을 내놓게 될 경우에는 적어도 그 판단 자체는 존중받을 것이라고, 자신의 논증 부족에 대한 비판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재판 외적인 사유로 부당하게 매도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법이 존중받을 것이라는 그 믿음 아래 판사들은 변화에 발맞추어 법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고민과 노력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노력은 역으로 사법을 존중받을 만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최근 대통령실은 특정 연구회에 가입했다는 사실만으로 대법관 후보에 오른 판사들을 ‘특정 이념·성향에 치우친 판사’로 매도하였고, 사회 일각에서는 대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판결 이유가 아닌 주심 대법관의 정치적 성향을 근거 없이 단정하여 비난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판사들은 무엇이 올바른 법 해석인지 치열한 고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재판에 대한 비판은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결단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아야 한다. 사법에 대한 존중이 무너져 내릴 때, 우리 사회는 무엇을 잃게 될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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