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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챗지피티와 여의도 ‘워딩기계’

등록 2023-06-22 19:12수정 2023-06-23 02:40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슬기로운 기자생활] 선담은 | 정치팀 기자

국회를 출입하는 저연차 기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워딩을 잘 받아치는 일’이다. 푸른색 돔 지붕이 상징인 국회 본관 2층에 들어서면 바닥에 널브러져 앉아 이어폰을 꽂고 무언가를 노트북에 치고 있는 기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침 최고위원회의나 원내대책회의는 물론 각종 회의와 행사 뒤 백브리핑에서 나온 정치인의 말을 제대로 받아친 게 맞는지 녹취를 확인하고 수정하는 장면이다. 흔히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라는데, 국회 출입기자는 그런 정치인의 말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노트북에 받아치느냐가 곧 개인의 능력이 된다. 조금 전 회의에서 정치인이 무슨 말을 했고, 어떤 말실수 등을 했는지 실시간으로 회사에 보고하며 그날의 ‘밥값’을 한다.

손이 느린 편인 내게 워딩을 받아치는 일은 ‘일의 기쁨과 슬픔’ 중 후자에 가깝다. 운동선수도 아닌데, 어떤 날은 컨디션이 좋아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다가도 그보다 더 많은 경우 오타를 고치고 미처 받아치지 못한 부분을 채워 넣느라 스마트폰 녹음 파일을 여러번 들으며 적지 않은 시간을 쓰기도 한다. 말 그대로 단순업무,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경선 후보 시절 발언해 논란이 됐던 ‘손발 노동’ 그 자체다. 요즘은 인공지능(AI)이 음성을 인식해 텍스트로 변환해주는 애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부정확한 발음이나 사투리를 완벽하게 인식하는 건 아니라서 결국 사람 손을 거쳐야 한다. 이런 과정이 때론 너무 비효율적인 노동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기자인가, 속기사인가”라는 정체성의 혼란이 올 때도 있다.

이런 기자들의 모습을 20년 동안 지켜봤다는 한 여당 의원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옛날엔 현장 기자들이 수첩에 중요한 말만 적었기 때문에 각 매체 기자들이 사실상 ‘1차 데스크’였는데 요즘은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워딩을 다 치더라. 어차피 인터넷 속보 경쟁 기사들은 다 똑같던데 불필요하게 그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

국외 출장을 자주 다니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한 의원도 비슷한 얘길 한 적이 있다. 그는 “중국 국영매체 본사에 가보니 스트레이트 기사는 다 인공지능이 쓴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대회를 하면 인공지능이 참석자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인식해서 거의 완벽한 기사를 쓰기 때문에 기자들은 그 시간에 다른 현장을 찾아 독창적인 기사를 쓴다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의원은 “한국 기자들은 맨날 국회 땅바닥에 앉아서 뭘 치고 있으니까 시야가 좁아지는 것 같다. 나중에 인공지능에 대체될 것 같다”고 평가했다. 챗지피티(ChatGPT) 시대에 부정할 수 없는, 어두운 예견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6~7년 전부터 ‘인공지능 로봇기자’가 날씨나 증시 속보, 스포츠 경기 결과 기사를 생산하고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까진 정치 기사를 인공지능이 작성한다는 얘긴 못 들어봤다. 아마도 당대표나 원내대표 등을 회의실 밖에서 기다리거나 쫓아가 ‘워딩 따는’ 일은 튼튼한 다리가 없는 인공지능이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이따금 방송 뉴스에서 여러 기자들이 녹음 버튼이 눌러진 스마트폰을 국회의원 얼굴에 들이밀고 쫓아가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이렇다 할 팩트체크 없이 현안에 대한 정치인의 워딩을 중심으로 쓰는 ‘막말·공방 기사’의 경우 언젠가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신해 기사를 작성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챗지피티 같은 인공지능이 기자의 노동을 완전히 대체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가끔은 기술의 발전이 내 ‘손발 노동’의 버거움을 덜어줬으면 하는 얄팍한 기대가 교차한다. 결국 답은 인공지능이 아닌 사람에게 있을 것이다. 언론이 챗지피티는 할 수 없는 질문을 하고 답을 끌어내는 것, 꼼꼼한 검증을 통해 챗지피티는 쓸 수 없는 기사를 쓰는 것 말이다. 여의도의 기자들은 언제쯤 ‘워딩 잘 받아치는’ 손발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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