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크리틱]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운일까? 적어도 태어나는 쪽에서 보자면 그렇다고 믿고 싶지만, 웹툰 <고스트 터미널>에는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원하는 조건에서 환생할 수 있는… 면세점 시스템”이 존재한다. 환생하러 가는 배에 타기 전 터미널 면세점에서 부모 선택권을 구매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세상에서도 금수저로 환생하기 위해 죽어라 돈을 모아야 한다.
그러나 이 기상천외한 저승에도 국경이 있는지 인종이나 나라를 바꾼 환생에 관한 언급은 찾기 힘든데, 그걸 보면 근대국가와 더불어 형성된 인위적 국경이 생물적 조건 이상으로 우리를 단단히 가두고 있는 게 분명한 듯하다. 지금 벌어지는 큰 전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 인류는 영역의 경계를 설정하고 지키는 문제에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피를 많이 쏟지 않았을까. 그것도 주로 그 영역 안에 진짜 지분은 1도 없는 사람들의 피를.
세계화가 되었다지만 그것은 세계화를 주도한 자본주의 체제의 입맛에 맞게 세계경제를 구축하여 자본의 자유로운 움직임이 보장되었다는 의미이지 누구에게나 국경의 담이 낮아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세계화로 인한 나라 간 빈부격차의 심화 때문에 국경은 빈국의 빈민에게 더 단단해지고 높아진다. 하물며 난민이 자유롭게 국경을 통과하며 목숨을 이어갈 곳을 찾을 수 있게 보장해주는 세계는 지금 <고스트 터미널> 같은 만화적 판타지로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국경 외부의 난민은 철저하게 차단하되 내국인이 피하는 힘든 일을 값싸게 해줄 노동력만 필요한 만큼 들여오고, 들인 뒤에는 내부에 설정한 추가의 경계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오지 못하게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 그리고 내부자들은 이런 이중의 경계 내에서 계속 쾌적하게 살아가는 것, 이 또한 타자화된 존재들의 악몽 위에 쌓아 올린 판타지 아닐까.
다르덴 형제의 영화 <토리와 로키타>에서 로키타의 꿈은 벨기에의 가사도우미가 되는 것이다. 카메룬 출신의 이 열여섯살 소녀 밀입국자는 이탈리아를 거쳐 벨기에에 왔으며, 고향 가족에게 돈을 보내고 밀입국 비용도 갚아야 하기에 학교는 꿈도 못 꾸고 이제 체류증만 나오면 가사도우미 교육을 받으려 한다. 베냉 출신의 열한살 소년 토리는 로키타와 함께 난민 생활을 거치면서 친남매 이상의 유대를 형성하여 쉼터에서 같이 살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 로키타가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자해하며 이 사회의 경계를 넘는 게 왜 이리 힘드냐고 한탄하자 “우리는 환영 못 받잖아” 하고 한마디로 정리해줄 만큼 똑똑한 아이다. 경계를 넘지 못한 로키타는 토리와 함께 경계 밖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존을 유지한다.
토리와 로키타를 보면서 우리는 십여년 전 <자전거 타는 소년>의 시릴과 사만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시릴 또한 인종과 국적만 다르다 뿐이지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사는 내부 난민으로, 토리와 마찬가지로 삶의 경계 언저리를 늘 숨 가쁘게 뛰어다니고 자전거로 달린다. 그러나 시릴은 위탁모 사만다를 만나 혈연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루면서 난민 상태에서 벗어나 관습의 경계를 넘는 유대로 나아갈 가능성을 찾아낸다. 반면 토리와 로키타는 출발점에서는 이런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경계 안에 사는 내부인들과는 무관한 바깥 타자끼리의 관계에 머물다 경계의 벽에 부딪혀 붕괴하고 만다. 결국 토리는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제…나는 외톨이야.”
늘 벼랑에 내몰린 인물을 코앞에서 지켜보며 인간이 도달한 지점을 살피고 미래를 전망하던 지혜로운 노감독들은 이주자를 만나면서 십년 전과는 사뭇 다른 비관적 결론에 도달한 듯하다. 국경의 벽은 그렇게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가 보다.
영화 <토리와 로키타>의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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