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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좀비민주주의가 온다

등록 2023-06-20 19:16수정 2023-06-22 22:10

경찰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인근 인도에서 열린 비정규직 노동단체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의 1박 2일 문화제 참가자들을 강제 해산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찰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인근 인도에서 열린 비정규직 노동단체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의 1박 2일 문화제 참가자들을 강제 해산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수사, 감사, 압수수색, 구속, 기소, 금지, 제한, 엄벌, 엄단, 강제연행….

윤석열 정부 시대에 우리는 매일 이런 단어를 접하고 있다. 지금 국가는 한 손에 법전을, 다른 손에 회초리를 들고 국민을 준법자와 범법자로 나누어 처벌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국가와 국민의 관계, 국민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억압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은 노동자 탄압이다. 건설노동자 양회동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후에도 경찰은 노조사무실과 노조원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하청노동자 처우 개선을 호소하며 고공농성하던 금속노련 사무처장은 피투성이가 되어 강제 연행되었고, 비정규직 노동단체의 문화제도 강제 해산당했다. 이런 국가폭력이 노동현장에선 연일 일어나고 있다.

나아가 대통령과 여당은 집회·시위 등 시민들의 집합적 의사표현을 제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대통령이 ‘엄격한 법 집행’을 연일 강조하는 가운데, 국민의힘은 야간집회 금지와 집회·시위 대응에서 경찰력 행사에 대한 면책 조항 신설 의지를 밝혔다. 이는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공권력 남용을 고무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때려도 좋다”는 신호인 것이다.

경찰의 위해성 장비도 다시 등장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에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사망한 뒤 사라졌던 최루탄 물질 캡사이신 분사기를 배치했고, 살수차의 재도입 가능성도 시사했다. 헌법재판소는 2018년 최루액을 섞어 쏘는 혼합살수, 2020년 사람을 향한 직사살수가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고,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했다.

집권세력은 문재인 정부가 법 집행을 방기해서 질서를 바로잡는 듯이 호도하는데 이는 자가당착이다. 문 정부 시기에 주말마다 서울 도심을 점령하고 초대형 스피커로 극렬한 구호를 외친 것은 우익단체들과 태극기부대였다. 현 정권은 그런 세력과 손잡고 탄생했으니, 문 정부가 집회·시위 자유를 과도하게 보장했다고 주장할수록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셈이 된다.

세계 각국에서 공권력과 시민의 관계가 변해온 추이를 보면 윤석열 정부의 시대착오성이 분명해진다. 집회, 시위, 서명운동 등 시민들의 의사표현 행위에 대한 국가의 대응을 연구한 학자들은 몇가지 국가별 전통을 유형화했다. 영국의 ‘커뮤니티 경찰’ 모델,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의 ‘법치국가’ 모델, 북유럽의 ‘대화형’ 모델, 프랑스·이탈리아의 억압적인 ‘왕의 경찰’ 모델 등이다.

이처럼 다양한 전통이 있었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시민들의 자유권에 대한 국가의 제한이 점차 사라지고, 대화와 교섭을 통해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쪽으로 수렴되어왔다. 이에 따라 시민 참여자들도 공권력과 충돌하기보다는 사회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시민 참여 행동과 공권력의 대응은 독재시대 억압-충돌 모델을 탈피하여 선진국형 대화 모델로 발전해왔다. 독재시대 공권력은 정권 유지와 기업 이익에 위배되는 시민, 노동자의 행동을 억누르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청년들을 정권 유지 도구로 희생시킨 전·의경 제도가 폐지됐고, 사복경찰 체포조 ‘백골단’도 사라졌다. 경찰은 집회·시위의 자유와 공공질서 유지를 조화시킬 ‘대화경찰’ 개념을 도입했다. 집회·시위 문화도 달라졌다. 불법·폭력 건수는 김영삼 정부까지 연 800건이 넘었으나 김대중 정부 때 100건 이하로 급감한 뒤 계속 줄어 2018년에는 12건으로 거의 사라졌다.

이처럼 한국에서 국가와 시민의 관계는 선진국 모델로 개선되어왔다. 그것은 특정 정권의 편향이 아니라, 모든 정권이 큰 틀에서 합의했던 기본 방향이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이 모든 역사를 한순간에 깨뜨리고 독재시대 국가관으로 회귀하고 있다. 국민의 신체와 자유에 함부로 위해를 가하고 공권력 행사에 절제를 모르는 국가 말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체제를 독재로 규정할 순 없지만, 독재국가의 특징적인 태도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음을 위중한 징후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방향으로 퇴행을 계속한다면 우리나라는 선거라는 껍데기만 있고 자유의 생명력은 사라진 좀비민주주의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희망의 죽음, 미래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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