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사회보장전략회의에서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세상읽기]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소셜코리아 운영위원장
점점 더 어려워지는 민생에 대한 깊은 고민과 염려 때문일까. 지난 5월31일에 개최된 ‘사회보장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예정된 회의 시간의 절반 가까이 쓰며,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보장 전략에 대해 이야기했다. 수십년간 사회정책을 연구했을 전문가들은 대통령의 발언을 경청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국내총생산(GDP) 규모 세계 10위, 1인당 지디피 3만5천달러, 지디피의 14.8%를 사회지출에 쓰는 나라의 대통령이 ‘사회보장전략회의’를 주재하면서 사회보장의 에이비시도 숙지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사회보장이라고 하는 것은 국민이 행복하게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요한 조건들이 어떤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사회보장제도는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크게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서비스 세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보험은 실업, 질병, 노령 등으로 인해 소득을 상실한 국민이 빈곤에 빠지지 않고 소득 상실 전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 공공부조는 대통령이 강조하는 약자를 위한 대표적인 복지제도로 취약계층을 선별해 소득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서비스는 국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돌봄, 보건, 의료, 교육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통령의 소망처럼 ‘국민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 세 제도가 효과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사회보장전략회의’는 당연히 이 세 제도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개선 전략을 논의하는 자리이다. 제도의 사각지대는 없는지, 현금 급여는 빈곤을 예방하고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적절한지, 양질의 사회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가 아는 사회보장제도의 상식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현금 복지는 선별 복지로 약자 복지로 해야지 보편 복지로 하면 안 된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중산층의 생활수준 유지라는 사회보험의 기본 원칙에 반한다. 취약계층만이 사회적 위험에 직면했을 때 현금지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중산층도 사회보험과 같은 현금지원 제도가 없다면, 안정적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선진 복지국가 대부분이 보편적 현금지원정책을 제도화하고 있는 이유이다.
사회서비스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은 더 당황스러웠다. 약자 복지를 주장하던 대통령이 느닷없이 “보편 복지는 가급적이면 사회서비스 복지로 가야 된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보편 복지가 서비스 복지로 갈 때의 장점은 이것이 시장화될 수 있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에 경쟁을 조성함으로 해서 더 나은 서비스가 만들어질 수 있고, 그게 가능해진다”는 발언에는 할 말을 잃었다.
대통령의 발언은 혼란스럽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민간 제공자가 시장에서 경쟁하면,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낮은 가격에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서비스 노동자의 “보상 체계도 점점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은 경쟁이 주는 부가적인 혜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이 맞는다면, 서비스 제공자의 97%가 민간으로 구성된 요양서비스 기관은 진작 양질의 서비스를 보편적으로 제공하고 있어야 한다. 요양시설이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비난받을 이유도, 요양서비스 노동자가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절규할 이유도 없다.
대통령은 이상한 복지국가를 꿈꾸는 것 같다. 중·상층이 재정을 부담하는데, 그 혜택은 저소득계층에게만 돌아가지만, 중·상층은 기꺼이 그 비용을 감내하는 복지국가. 돌봄이 필요한 국민이 시장에서 민간업자가 제공하는 사회서비스를 능력에 따라 구매해도, 모든 국민이 양질의 서비스를 보편적으로 누리는 복지국가. 세금과 복지지출을 줄이면서도 국민 모두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복지국가. 하지만 세상에 그런 복지국가는 없다.
정권의 이념에 따라 상이한 복지국가 전략을 갖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그 전략의 변경은 변덕스러운 시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는 기본 원칙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가 암묵적으로 합의했던 그 원칙의 경계를 넘었다. 대통령이 강조하는 “자유와 창의”라고 부르기에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도대체, 윤석열 정부 안팎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회정책 전문가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