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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대통령제의 위험’ 30년 전 경고, 현실화하다

등록 2023-06-13 17:41수정 2023-06-1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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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통령제 100년 결정적 장면들_01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인 1990년, 미국 예일대학 교수 후안 린츠는 유명한 에세이 ‘대통령제의 위험성’(The perils of presidentialism)에서 대통령제가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통령과 입법부 모두 선거로 선출되기에 언제든지 대통령과 의회가 갈등할 수 있고, 대통령이 아무리 무능해도 정해진 임기 중에 바꾸기가 매우 어려우며, 승자 독식 구조에서 대통령이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길 것이라는 게 린츠 교수의 주장이었다.

어린 시절 스페인 내전을 직접 겪어 민주주의 공고화에 관심이 많던 린츠 교수는 1970~80년대 중남미에서 대통령제 민주주의가 쿠데타와 독재, 부패로 얼룩지는 것을 보고 이 에세이를 썼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미국 대통령제는 1974년 닉슨 대통령의 중도 사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린츠 교수의 우려는 정치학자들을 제외하곤 대중적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에세이가 언론과 대중의 폭넓은 관심을 얻은 건 2016년 집권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을 거치면서다. 트럼프 시대엔 일방적 국정운영과 삼권분립 훼손, 극단적인 정치 갈등 등 대통령제의 단점이 적나라하게 표출됐다. 2021년 <퓨리서치 센터> 조사에서 미국은 한국과 함께 세계에서 정치적 갈등이 가장 심각한 나라 공동 1위에 올랐다.

미국 정치학자 존 캐리(다트머스대 교수)는 2021년 2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대통령제가 견고하게 유지돼온 것은 (대통령제에 비판적인) 린츠 교수에겐 도전이었다. 그러나 트럼프가 그의 퇴임을 꺼리는 대중을 부추겨 의회를 공격하도록 한 사건은 정확하게 린츠 교수가 걱정한 그런 종류의 갈등이었다. 린츠의 글에는 트럼프가 드러낸 다른 많은 메아리가 담겨 있다. 즉 강력한 대통령제가 독재적 성향을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

미국 대통령제가 심각하게 삐걱거린다는 징후는 많다. 미국 검찰은 지난 3월 성관계를 불법으로 입막음한 혐의로, 6월엔 기밀문서 반출 혐의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기소했다. 미국에서 전직 대통령을 형사기소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더 놀라운 건, 이렇게 기소된 전직 대통령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실제로 당선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점이다. <시비에스>(CBS) 방송이 11일 발표한 공화당 경선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61%의 지지를 받아 당내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다. 5월에 실시한 7개 주요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전·현 대통령의 양자 대결시 트럼프 전 대통령(45.5%)과 조 바이든 대통령(43.7%)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그는 자신을 ‘셀프 사면’하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 법 질서의 극적인 붕괴다. 재선 도전을 공식 선언한 바이든 대통령이 내년 대선일 기준으로 미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 후보가 될 거란 점도 대통령제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단면이다.

현시기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2공화국 시절 짧은 내각책임제 기간을 빼고는 줄곧 대통령제를 고수해왔다. 1919년 9월 상해 임시정부가 대통령제를 채택했던 때부터 치면, 100년의 역사를 갖는다. 특히 군부의 장기집권에 대한 반발로 1987년 6월항쟁 이후엔 절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는 ‘5년 단임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했다. 이후 1997년 12월 대선에서 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등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여러 차례 전직 대통령 구속이 있었지만, 한국은 미국과 함께 대통령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도 ‘대통령제 민주주의’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5월23일 국무회의에서 “민노총(민주노총) 집회로 서울 도심 교통이 마비됐다.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고 공공질서를 무너뜨린 집회 행태는 국민들이 용납하기 어렵다”며 엄정한 법 집행을 지시했다. 정부는 곧바로 불법 전력 있는 단체의 집회·시위를 제한하고, 출퇴근 시간대나 야간의 도심 집회·시위를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다. ‘불법 전력’이나 ‘출퇴근 시간대’라는 게 얼마나 자의적일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집회·결사의 허가제를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헌법 조항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현 정부는 지난해 8월 경찰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행정안전부에 경찰국을 신설했다. 법을 바꾼 게 아니라 대통령령(시행령) 개정을 통한 편법 직제개편이다. 또 검찰의 직접수사 개시 범위를 6대 범죄에서 2대 범죄(부패, 경제범죄)로 축소한 법률안을 피하기 위해 대통령령을 개정했다. 검찰 수사권 범위는 다시 넓어졌다. 정부는 <한국방송>(KBS)을 압박하기 위한 ‘수신료 분리징수’도 방송법을 개정하지 않고 시행령을 바꾸는 식으로 밀어붙일 생각이라고 한다. 시행령을 활용해 국회에서 의결한 법률을 무력화하거나 회피하는 건 대통령의 권력 남용, 곧 ‘제왕적 대통령’의 전형적 현상이다.

과거엔 ‘민주주의 후퇴 = 독재와 장기집권’이란 시각에서 접근했다. 그러나 최근엔 자유선거라는 정치상황 속에서 민주주의 후퇴가 일어나는 현상을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목격할 수 있다. 변형된 ‘선거 권위주의’의 출현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5월10일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문재인 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그 뒤로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재헌씨,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현철씨,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 홍업씨의 모습이 보인다. 갈수록 대통령제 장점인 정치적 관용은 사라지고 대립과 갈등, 검찰 수사의 칼날이 날카로워진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5월10일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문재인 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그 뒤로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재헌씨,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현철씨,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 홍업씨의 모습이 보인다. 갈수록 대통령제 장점인 정치적 관용은 사라지고 대립과 갈등, 검찰 수사의 칼날이 날카로워진다. 공동취재사진

올해 1월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민주주의 후퇴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이 결과를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주장에 공감한 응답자 비율은 72.3%에 달했다. 특히 김대중 정부 이후 어느 정부에서 민주주의 후퇴가 시작됐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45.8%가 ‘윤석열 정부’라고 답했다. 그다음은 이명박 정부(28.4%), 박근혜 정부(15.7%) 순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민주주의 후퇴가 시작됐다는 응답은 6.3%, 김대중 정부 2.2%, 노무현 정부 1.7%였다. ‘민주주의가 가장 많이 후퇴한 정부’를 꼽는 질문에도 압도적 1위는 윤석열 정부(57.7%)였다. (지병근 조선대 교수 논문 <민주주의 후퇴 인식의 이념적 편향성>에서 재인용)

대통령제의 자기 보완과 개선 능력은 이 제도가 활력을 가질 때 긍정적으로 작동한다. 대표적인 게 장기집권에 대한 대응이다.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무려 4선(1932~1945년)을 했고 네 번째 임기 중 뇌출혈로 숨졌다. 어찌 보면 ‘종신 대통령’이었던 셈이다. 그 이후 미국 의회는 두 번까지만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게 헌법을 고침으로써 장기집권 대통령의 출현을 막았다.

한국에도 ‘종신 대통령’이 있다.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숨진 박정희 대통령이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69년 3선 개헌과 72년 유신헌법 제정으로 종신 집권의 길을 텄다. 김재규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박 대통령은 많은 국민이 희생되더라도 끝까지 방어해낼 사람으로 (대통령을) 그만둘 사람이 아니다. 이를 알기 때문에 더는 방관할 수 없어 뒤돌아서서 그 원천을 두드려 부순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역시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7년간 전임자 못지않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퇴임 후엔 막후 실세가 되길 노렸지만, 1987년 6월항쟁으로 이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직후 개정된 헌법은 ‘5년 단임 대통령제’를 명문화했다. ‘5년 단임제’는 1인 장기집권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중요한 밑돌을 놓았다. 대통령제의 자정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강력한 대통령일수록 독재 또는 재집권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강력한 대통령’ 때문에 대통령제가 위태로워지는 건 아니다. 최근 대통령제가 민주주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건, 대통령이란 자리에 오르면 임기를 망각하고 지금 당장 행사하는 권력의 강렬함에 몰입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했던 “임기 5년이 뭐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어요”라는 말은 권력의 찰나적 속성을 잘 포착하고 있다. 권력은 물러나는 그 순간까지 모든 걸 압도할 수 있으리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착각이 민주주의 후퇴를 부르고, 대통령제의 긍정성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앞으로 한국 대통령제의 주요 장면들을 되짚어 보면서 ‘대통령제 민주주의’의 활력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본다.

박찬수 I 대기자

한겨레신문사에서 워싱턴특파원과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와 국회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 한국 진보운동의 과제를 담은 <진보를 찾습니다>(2021년)를 펴냈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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