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통령제 100년 결정적 장면들_01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인 1990년, 미국 예일대학 교수 후안 린츠는 유명한 에세이 ‘대통령제의 위험성’(The perils of presidentialism)에서 대통령제가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통령과 입법부 모두 선거로 선출되기에 언제든지 대통령과 의회가 갈등할 수 있고, 대통령이 아무리 무능해도 정해진 임기 중에 바꾸기가 매우 어려우며, 승자 독식 구조에서 대통령이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길 것이라는 게 린츠 교수의 주장이었다. 어린 시절 스페인 내전을 직접 겪어 민주주의 공고화에 관심이 많던 린츠 교수는 1970~80년대 중남미에서 대통령제 민주주의가 쿠데타와 독재, 부패로 얼룩지는 것을 보고 이 에세이를 썼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미국 대통령제는 1974년 닉슨 대통령의 중도 사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린츠 교수의 우려는 정치학자들을 제외하곤 대중적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에세이가 언론과 대중의 폭넓은 관심을 얻은 건 2016년 집권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을 거치면서다. 트럼프 시대엔 일방적 국정운영과 삼권분립 훼손, 극단적인 정치 갈등 등 대통령제의 단점이 적나라하게 표출됐다. 2021년 <퓨리서치 센터> 조사에서 미국은 한국과 함께 세계에서 정치적 갈등이 가장 심각한 나라 공동 1위에 올랐다. 미국 정치학자 존 캐리(다트머스대 교수)는 2021년 2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대통령제가 견고하게 유지돼온 것은 (대통령제에 비판적인) 린츠 교수에겐 도전이었다. 그러나 트럼프가 그의 퇴임을 꺼리는 대중을 부추겨 의회를 공격하도록 한 사건은 정확하게 린츠 교수가 걱정한 그런 종류의 갈등이었다. 린츠의 글에는 트럼프가 드러낸 다른 많은 메아리가 담겨 있다. 즉 강력한 대통령제가 독재적 성향을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 미국 대통령제가 심각하게 삐걱거린다는 징후는 많다. 미국 검찰은 지난 3월 성관계를 불법으로 입막음한 혐의로, 6월엔 기밀문서 반출 혐의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기소했다. 미국에서 전직 대통령을 형사기소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더 놀라운 건, 이렇게 기소된 전직 대통령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실제로 당선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점이다. <시비에스>(CBS) 방송이 11일 발표한 공화당 경선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61%의 지지를 받아 당내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다. 5월에 실시한 7개 주요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전·현 대통령의 양자 대결시 트럼프 전 대통령(45.5%)과 조 바이든 대통령(43.7%)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그는 자신을 ‘셀프 사면’하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 법 질서의 극적인 붕괴다. 재선 도전을 공식 선언한 바이든 대통령이 내년 대선일 기준으로 미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 후보가 될 거란 점도 대통령제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단면이다. 현시기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2공화국 시절 짧은 내각책임제 기간을 빼고는 줄곧 대통령제를 고수해왔다. 1919년 9월 상해 임시정부가 대통령제를 채택했던 때부터 치면, 100년의 역사를 갖는다. 특히 군부의 장기집권에 대한 반발로 1987년 6월항쟁 이후엔 절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는 ‘5년 단임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했다. 이후 1997년 12월 대선에서 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등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여러 차례 전직 대통령 구속이 있었지만, 한국은 미국과 함께 대통령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도 ‘대통령제 민주주의’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5월23일 국무회의에서 “민노총(민주노총) 집회로 서울 도심 교통이 마비됐다.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고 공공질서를 무너뜨린 집회 행태는 국민들이 용납하기 어렵다”며 엄정한 법 집행을 지시했다. 정부는 곧바로 불법 전력 있는 단체의 집회·시위를 제한하고, 출퇴근 시간대나 야간의 도심 집회·시위를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다. ‘불법 전력’이나 ‘출퇴근 시간대’라는 게 얼마나 자의적일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집회·결사의 허가제를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헌법 조항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현 정부는 지난해 8월 경찰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행정안전부에 경찰국을 신설했다. 법을 바꾼 게 아니라 대통령령(시행령) 개정을 통한 편법 직제개편이다. 또 검찰의 직접수사 개시 범위를 6대 범죄에서 2대 범죄(부패, 경제범죄)로 축소한 법률안을 피하기 위해 대통령령을 개정했다. 검찰 수사권 범위는 다시 넓어졌다. 정부는 <한국방송>(KBS)을 압박하기 위한 ‘수신료 분리징수’도 방송법을 개정하지 않고 시행령을 바꾸는 식으로 밀어붙일 생각이라고 한다. 시행령을 활용해 국회에서 의결한 법률을 무력화하거나 회피하는 건 대통령의 권력 남용, 곧 ‘제왕적 대통령’의 전형적 현상이다. 과거엔 ‘민주주의 후퇴 = 독재와 장기집권’이란 시각에서 접근했다. 그러나 최근엔 자유선거라는 정치상황 속에서 민주주의 후퇴가 일어나는 현상을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목격할 수 있다. 변형된 ‘선거 권위주의’의 출현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5월10일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문재인 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그 뒤로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재헌씨,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현철씨,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 홍업씨의 모습이 보인다. 갈수록 대통령제 장점인 정치적 관용은 사라지고 대립과 갈등, 검찰 수사의 칼날이 날카로워진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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