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나 지금이나 조선일보는 변한 것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무죄판결 선례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시 한 노동자가 목숨을 던지며 써나간 유서를 누군가 대필했다고, 현장에 있던 동료가 이를 방조했다고 제멋대로 매도하고 모독하는 패륜 행위를 저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지난 5월1일 제 몸에 불을 살라서 노조 활동에 대한 음해와 탄압을 고발하며 세상을 떠난 건설노조 간부 양회동씨 사건을 두고, <조선일보>는 사건 당시 곁에 있던 같은 조합 간부가 분신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곧이어 <월간조선>은 양회동씨 유서가 대필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필적감정 결과 유서가 그의 자필임이 확인되자 월간조선은 간략한 사과문을 내고 꼬리 내리는 시늉을 했지만 기사 삭제 등 후속 조치는 여전히 없고, 조선일보는 아직 어떠한 사과도 입장 표명도 없는 상태다.
이 희대의 언론 참사 앞에서 많은 사람이 조선일보를 두고 과연 ‘사회적 흉기’답다고들 한다. 여담이지만 ‘안티조선’ 운동이 한창이던 2001년 봄 어떤 칼럼에서 그 표현을 처음 사용해 조선일보 쪽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까지 당했던 필자로서는 쓴웃음을 머금지 않을 수 없다. 그때 필자는 이렇게 썼다.
“합법적으로 매일매일 그 어떤 위계와 사술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그리고 그 누구도 섣불리 이를 문제 삼을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흉기로 성장한 이들을 과연 누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언론 자유는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바로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거대 언론권력으로부터의 자유이다.”(
<한겨레> 2001년 3월19일치 3면 기고 ‘사회적 흉기’)
그때나 지금이나 조선일보는 변한 것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무죄판결 선례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시 한 노동자가 목숨을 던지며 써나간 유서를 누군가 대필했다고, 현장에 있던 동료가 이를 방조했다고 제멋대로 매도하고 모독하는 패륜 행위를 저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일보 등 수구언론의 문제는 이런 노골적인 여론의 왜곡과 조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사태가 잘 보여주듯이 그 왜곡과 조작의 심층에 있는 노동자에 대한 멸시와 혐오는 한국의 주류 여론층 전체가 가지고 있는, 심지어 같은 노동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까지도 퍼져 있는 매우 심각한 하나의 병리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노동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공공연한 타자다. 나아가 노동조합을 결성해 자신의 권리를 집단으로 지키고자 하는 조직노동자들은 거의 공공의 적으로 취급받는다.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생산직종과 서비스직종,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모두 포함하면 우리나라 생산가능인구의 절대다수는 모두 자신의 노동을 자본가에게 판매해 임금을 받고 살아가는 노동자들이다. 이번에 대형 사고를 친 조선일보 기자도 언론노동자이고, 이를 개탄하는 필자도 알고 보면 일개 교육노동자다.
정치판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그렇게 강조하는 ‘민생’이란 것도 결국 국민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삶일 텐데, 민생을 절대 우선해야 한다고 침을 튀기던 국회의원들도 ‘노동자들의 삶을 향상시키자’고 하면 주춤한다. 노동자라고 호명되는 순간 멀쩡하던 사람들 시야에는 일종의 편광 필터가 끼워지고 입에는 보이지 않는 재갈이 물린다. 게다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 명백한 힘의 비대칭성을 완화하고자 헌법에서 노동3권을 보장하고, 근로기준법 같은 각종 노동자 보호 입법이 제도화되고, 노동조합이 만들어져 노동자들의 가입이 장려되고 있음에도 노동조합, 단체행동, 파업 같은 말들은 어쩐지 가급적 기피돼야 할 어두운 말들로 분류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사회가 노동자와 임노동을 타자화하고 노동운동을 적대시하는 거대한 사회심리적 카르텔이 지배하는 사회, 간단히 말하면 자본가계급의 헤게모니가 철저히 관철돼온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중동을 일컬어 수구언론이라고 하지만, 그 본질은 결국 자본가계급을 대변하는 당파적 언론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틈만 나면 노동자들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기사를 써대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갈등과 이해를 조정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국가의 역할일 텐데, 이번 윤석열 정부는 집권 이래 노골적으로 친자본·반노동 정책을 일관되게 구사해 툭하면 노동시간을 늘린다, 노조를 압수수색한다, 정부보조금 회계감사를 한다, 노조 활동을 조폭 활동처럼 취급한다, 정당한 쟁의 투쟁을 몽둥이찜질로 대응한다 하는 판이니, 마침 분위기도 좋겠다 계급언론의 선봉에 선 조선일보는 이 기회에 권력과 손잡고 ‘주제넘은 노예’들을 한 방에 보내버릴 건수를 하나 잡았다 싶었을 것이다.
한두번 겪는 일도 아니건만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금 밀려오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다. 참으로 잔인한 세상이다. 전태일 열사에서부터 양회동 열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무슨 폭력혁명을 하자 했는가, 자본가계급을 처단하자 했는가? 한때 급진 노동자 조직의 리더였던 한 시인이 간절히 바랐던 것처럼, 우리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기계나 개돼지처럼 죽도록 일해야 겨우 먹고사는 삶이 아니라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는 저녁이 있는 삶’ 그 이상이 아닐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누군가에게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누리는 삶의 작은 여유들이 누군가에게는 한번이라도 누려보고 싶은 평생의 소원인 세상이 과연 이대로 연년세세 유지돼도 좋단 말인가. 명색이 국민소득 3만달러고 세계 10위 무역대국인 ‘선진국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길거리에 나서거나 높은 굴뚝 위에 올라가서 장기 농성을 하거나 아니면 제 몸에 불을 지르면서도 이런 작은 꿈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 세상이 과연 얼마나 잘난 세상이길래, 노동자라면 천민 대하듯 하고 노동조합이라면 도끼눈을 뜨며 파업이라면 세상 모두 들고일어나 욕을 해댄다는 말인가.
의사가 연봉 1억을 받으면 벽돌공은 7천만원을 받는 스웨덴 이야기를 하면, 그 나라 국민소득은 10만달러 아니냐고들 반박한다. 하지만 국민소득 1만달러 때부터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때부터 의사건 벽돌공이건 누구든 저녁이 있는 삶을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스웨덴의 오늘이 올 수 있었을까? 자칭 ‘신문 그 이상의 신문’이라는 거대 보수언론이, 제 몸을 불에 사른 한 사람의 노동자가 외친 마지막 말 한마디에 다가가 귀를 기울이지는 못할망정 그 죽음이 방조됐고 그 유서는 대필됐다고 저주를 퍼붓는 이 나라에서 노동자들이 모차르트를 듣는 그런 저녁이 올 수 있을까,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