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진보는 보조금으로 오지 않는다

등록 2023-06-07 18:21수정 2023-06-07 18:47

이관섭 대통령실 국정기획수석이 지난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민간단체 보조금 감사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관섭 대통령실 국정기획수석이 지난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민간단체 보조금 감사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지난해 정부가 ‘전수조사’에 착수한다고 발표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이달 4일 대통령실은 비영리 민간단체 보조금 감사 결과를 발표했고, 다음날 윤석열 대통령은 “보조금 비리에 대한 단죄와 환수 조치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 비영리 민간단체에는 물론 시민단체가 포함돼 있다.

정부는 314억원 수준의 부정 사용을 적발했다면서 처벌에 중점을 둔 대규모 ‘개선방안’을 나열했다. 적발된 단체는 향후 5년간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배제하며, 부정하게 수령 및 집행된 보조금은 전액 환수하고, 심각한 사안은 고발 및 수사의뢰하겠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보다 선제적인 규제책도 발표했다. 앞으로 “선심성 사업”은 구조조정될 것이며, 내년도 민간단체 지원 예산을 5천억원 이상 삭감하고, 회계감사 대상 역시 확대하겠다는 것이 그 뼈대다. 심지어 윤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 감시와 신고를 활성화하기 위해 포상금 제도를 확대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제 정부 비판적 사업은 설령 그 비판이 정당하거나 필요한 것일지라도 보조금이 끊길까, 혹은 신고당할까 두려워 애초에 추진되지 못할 수 있다. 5년 동안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타격인가? “고발과 단죄”의 엄포 앞에 당장 시급한 사업이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밀려날 수도 있는 일이다. 반면 정부 정책기조에 발맞춘 사업은 우선해서 보조금을 지원받게 될 것이다. 이번 발표로 시민사회의 경직이 우려되는 이유다.

물론 민간단체의 보조금 부정 사용은 반드시 뿌리뽑아야 하며, 보조금이 이권 추구에 활용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시민단체 전체를 범죄집단으로 매도하거나 시민사회 영역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부추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국민의힘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민단체가 아니라 범죄단체” “국고 탈취범들의 모임” “가짜 엔지오(NGO)”와 같은 자극적인 표현들을 쏟아냈고, 특정 진보성향 단체를 겨냥해 본격적인 수사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여권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집단을 “폭도”, “약탈”과 같은 용어를 써서 범죄자로 호명함으로써 현 정권은 비판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결국 건설적 비판과 견제 세력마저 “위법”이라는 공격 앞에 크게 위축될 것이다.

미국의 비판 이론가 딜런 로드리게즈는 신자유주의적 복지서비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각종 보조금에 기대게 된 시민사회가 처한 현실을 ‘당근과 채찍’이라는 비유로 표현했다. 정부, 기업, 비영리재단의 중점 과제에 걸맞은 사업을 해내며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숫자’를 뽑아내는 단체들은 각종 보조금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물적 지원이라는 ‘당근’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어떤 시민단체는 ‘주류’가 되기도 하고 기득권과 친밀하게 결탁하기도 한다. 반면 현 사회체제에 내재해 있는 구조적 한계를 전면에 드러내고 보다 발본적인 변혁을 부르짖는 단체들은 사회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처벌당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운동의 범죄화라는 ‘채찍’이다.

이처럼 ‘당근과 채찍’ 전략을 적절히 배분함으로써 정부가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 바로 사회운동의 테두리를 규정짓는 것이다. 즉, 기득권의 선호에 맞춰 시민단체의 활동 범위가 결정된다. 시민사회의 진보적 역량은 재정지원 대상인지 아닌지 여부에 따라 구획되고, 활동가들은 사업계획서와 공모전 응모에 최적화된 “프로”가 된다. 한정된 자원과 각박한 환경 속에서 시민단체들은 결국 지원금과 법제의 제약 앞에 타협할 수밖에 없다. 장기적 변화를 가능케 할 혁신적 사유들은 보조금 앞에서 뒤로 밀려나고, 가장 취약한 이들을 위한 밑바닥의 실천들은 우선순위에서 탈락한다. 사회운동은 협소한 스펙트럼 안에서 부족한 자원을 놓고 서로 경쟁하게 된다.

그래서 시민사회를 구할 것은 우리뿐이다. 시민단체의 생존이 ‘당근과 채찍’에 결판나지 않으려면 풀뿌리로부터 자원이 모여야 한다. 보조금에 기대지 않고 사회운동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힘은 오직 평범한 사람들의 참여뿐이다. 소액이더라도 다수의 풀뿌리 후원이 장기적으로 이어진다는 전망이 있을 때 사회운동은 변절하지 않고 뚝심 있게 지속될 수 있으며, 그 활동기반을 두려움 없이 단단하게 다질 수 있다. 진보는 보조금으로 오지 않는다. 지금 당장 어려움에 처한 시민단체를 찾고 소액 후원을 시작하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김건희 수렁’ 이토록 몰염치한 집권세력 1.

‘김건희 수렁’ 이토록 몰염치한 집권세력

[사설] 전직 감사원장들의 한심한 ‘탄핵 반대’ 성명 2.

[사설] 전직 감사원장들의 한심한 ‘탄핵 반대’ 성명

상법개정 반대 ‘궤변’, 1400만 투자자가 바보인가 [아침햇발] 3.

상법개정 반대 ‘궤변’, 1400만 투자자가 바보인가 [아침햇발]

[사설] ‘채 상병 순직’ 국정조사, 국민의힘 반드시 동참해야 4.

[사설] ‘채 상병 순직’ 국정조사, 국민의힘 반드시 동참해야

[사설] 가상자산 과세도 2년 유예…‘감세’만 협치하는 여야 5.

[사설] 가상자산 과세도 2년 유예…‘감세’만 협치하는 여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