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제노사이드의 기억
제주 _03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이여,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아라. 저 바람에 스석대는 대숲이 있던 집터와 올레, 그리고 마을의 역사와 더불어 살아온 저 팽나무를, 서러운 옛이야기가 들리지 않는가. 다시는 이 땅에 4·3과 같은 서러운 역사가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이 표석을 세운다.’
4·3사건으로 내려졌던 한라산 금족령(출입금지령)이 1954년 9월21일 해제되면서 강제로 해안마을로 내려와 살던 중산간마을 사람들 상당수는 본디 살던 원주지로 찾아 올라갔다. 하지만 군경 토벌대의 방화로 사라진 집을 다시 짓고, 새로 농토를 개간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여전히 중산간지대는 ‘공비출몰 지역’이라며 자주 소개됐고, 악몽과도 같은 현실이 벌어졌던 마을로 복귀를 원하지 않는 주민들도 많았다. 4·3사건이 발생 15년이 지난 1962년까지도 원주지로 복귀하지 않은 이재민은 7704세대, 4만419명에 달했다. 오랜 난민정착 복구사업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이 돌아오지 않아 폐허가 된 마을이 제주섬 여러 곳에 생겨났다. 그렇게 지도에서도 사라진 마을들을 제주에서는 ‘잃어버린 마을’이라고 한다. <제주4·3사건 추가진상보고서>(2019년)는 잃어버린 마을이 134개라고 밝혔다.(124쪽) 131개 마을은 초토화 작전 때 진압군에 의해서, 3개 마을은 무장대의 방화로 사라졌다.
한동안 ‘잃어버린 마을’의 흔적을 찾아 여러곳을 헤매고 다녔다. 그 가운데 애월읍 자리왓마을 터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마을은 사라졌지만, 마을의 당산나무였을 팽나무는 살아서 홀로 마을 터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1417-1번지 일대 30여호가 모여 살던 자리왓마을은 1948년 11월23~25일 단 사흘 동안 소개됐는데, 대부분의 사라진 마을들이 그랬듯 소개 뒤 이어진 진압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폐허로 변했다. 주민들은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고 새로운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2017년 찾은 자리왓마을 중심지였던 왕돌거리에는 제주 특유의 올레와 집터 흔적들조차 거의 사라지고 팽나무 주변에 대나무밭이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올해 3월 또다시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자리왓마을 팽나무를 찾았다. 이번에도 저물녘에 동쪽에서 접근했는데, 서쪽으로 지는 붉은 해의 황혼 기운을 배경으로 팽나무의 실루엣이 뚜렷했다. 가로등이 없던 시절 그 옛날에도, 외지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 어슴푸레한 저녁 동네 들머리에 우뚝 솟아있는 팽나무를 보노라면 이젠 집이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그 팽나무 아래에는 2002년 4월3일 세운 자리왓 표석이 있었다.
‘이곳은 4·3 와중에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자리왓 마을 터이다. 250여년 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30여 가호에 150여 주민들이 밭농사를 지으며 살던 전형적인 중산간마을이었다. 마을 가운데는 서당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여러 마을 촌장들이 자리왓 팽나무 아래 모여서 대소사를 의논하여 정겹게 살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4·3의 광풍은 이 마을들을 여지없이 세차게 뒤흔들어 놓았으니, 1948년 11월 중순쯤 소개령이 내려지고 주민들이 아랫마을로 이주한 뒤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고, 그 와중에 5명이 희생되었다. (…)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이여,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아라. 저 바람에 스석대는 대숲이 있던 집터와 올레, 그리고 마을의 역사와 더불어 살아온 저 팽나무를, 서러운 옛이야기가 들리지 않는가. 다시는 이 땅에 4·3과 같은 서러운 역사가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이 표석을 세운다.’
검은 표석에 새겨진 사연이었다. 팽나무는 오래전 마을이 평화로웠던 시절의 기억보다 4·3사건 때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비명, 마구 쏘아대는 총소리와 초가집들이 화염에 휩싸인 뜨거운 불길을 더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건물 4층 정도 높이 팽나무 둘레가 궁금해져 팔을 펴 끌어안아 보니 3번을 더 펼쳐야 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겉껍질은 거칠었고 손바닥으로 스치기만 해도 표피가 부서져 떨어졌다. 큰 줄기에는 자연스럽게
뚫렸는지 새들이 보금자리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주먹보다 큰 구멍이 나 있었다. 가로등도 없고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팽나무 주변은 금세 어둠에 젖어들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몇걸음 걷다가 멈춰 뒤돌아보고 또 좀 걷다 뒤돌아보기를 여러번, 어느새 눈에서 아득히 멀어진 팽나무를 뒤로 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멀어져가는 손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슬픈 듯 가지를 살랑살랑 흔들던 자리왓마을 팽나무는 오늘도 잃어버린 마을을 홀로 지키고 있겠지.
bong9@hani.co.kr
‘잃어버린 마을’ 자리왓마을의 팽나무는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2017년에 이어 올해 3월에도 찾았다. 두번 모두 저물녘 동쪽에서 접근했는데 서쪽으로 지는 붉은 해의 황혼 기운을 배경으로 멀리서도 팽나무의 실루엣이 뚜렷했다. 제주어로 폭낭으로 불리는 팽나무는 20m 높이까지 자라고, 제주에서는 마을의 신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김봉규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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