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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일터에서 또, 죽었다

등록 2023-05-21 18:28수정 2023-05-22 02:34

충남 태안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 발전소에서 고 김용균씨 2주기 현장추모제가 열린 2020년 12월10일 한 참가자가 쓰고 있던 안전모. 태안/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충남 태안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 발전소에서 고 김용균씨 2주기 현장추모제가 열린 2020년 12월10일 한 참가자가 쓰고 있던 안전모. 태안/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서울 말고] 권영란ㅣ진주 <지역쓰담> 대표

5월 첫번째 주말 일하러 나간 한 청년 노동자가 귀가하지 못했다.

지난 6일 무림페이퍼 진주공장에서 사고가 났다. 제지가공 기계의 이물질을 제거하던 노동자가 이송장치와 실린더 헤드 사이에 머리가 끼었다. 쓰고 있던 안전모까지 함께 눌렸다. 근처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나흘째 끝내 사망했다. 정규직이 된 지 채 2년도 안된 26살 청년이었다.

무림페이퍼 공장은 진주시내 남강 가에 있다. 공장 옆에는 초등학교, 아파트는 물론 잘 조성된 강변 산책로가 있어 운동·산책하는 많은 시민이 지나다닌다. 대부분 시민이 여유로운 어린이날 연휴를 보내고 있을 때 일터로 출근한 청년 노동자는 4인1조로 작업 중에 참변을 당했다.

1973년 설립된 이 공장은 상시근로자가 500명이 넘는다.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 사업장이다. 지난해 1월27일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은 상시 근로자 50인 이상(건설업은 공사금액 50억원 이상) 사업장에서 근로자 사망 등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사고예방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경영책임자를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부산지방고용노동청이 정확한 사고 원인과 중대재해처벌법,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조사 중이라니,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문제는 무림페이퍼 노동자 사망 사고가 이번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2018년에도 20대 노동자가 대형 롤에 끼임 사고를 당해 숨졌고, 2021년에는 50대 하청 노동자가 펄프장 5호기 주변에서 야간작업 중 감전사고로 사망했다. 민주노총 경남본부 관계자는 “무림페이퍼는 매년 사고가 일어나는 사업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예방할 수 있는 사고였다. 2018년 사고 당시 작업의 위험요인을 조사하고 사업주가 대형 롤 가공시스템에 자동센서나 버튼 잠금장치를 해야 했다. 당시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기 전이라 산업안전보건법만으로는 사업주 처벌이 어려웠고 (그래서 문제점이) 시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웃 지역에서도 최근 산재 사망 사고가 잇달아 발생했다. 지난 8일 오전 10시45분께 경남 양산지역 압력용기 제조공장에서 천장 크레인에 매달려 있던 철제 덮개가 떨어지면서 그 밑에서 작업하던 50대 직원이 사망했다. 하지만 직원이 10인 이하인 이 사업장은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나흘 뒤인 12일 오전 10시6분께 김해 생림면 화학제품 제조공장에서는 지게차가 전복돼 60대 직원이 깔려 숨졌다.

이렇듯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뒤에도 우리 주변 일터에서의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지하도 공사를 하다가, 아파트를 짓다가, 청소하다가, 배를 만들다가, 빵을 만들다가, 배달하다가, 노동자가 죽는다. 앞으로도 죽어 나갈 것이다. 하루에 2~3명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다. 삶을 위한 일터에서 다치고 죽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전에는 산재 사망사고가 나더라도 사업주는 과태료 몇백만원을 부과받는 것으로 끝나곤 했지만, 이제는 실형 선고도 가능하다. 그런데 법 제정 취지가 무색하게도 시행 6개월이 되지 않은 지난해 6월 이곳(진주 갑)을 지역구로 둔 박대출 의원(국민의힘)은 처벌·규제 수위를 낮은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사장님들 처벌’을 완화해주자는 것이다.

봄날 일터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 모두 사고 당일 “회사 다녀오겠습니다”며 출근했을 것이다. 친구들보다 먼저 취업하고 정규직이 돼 월급을 받으면서 때때로 행복한 꿈을 꾸고 앞날을 계획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내 이웃이었을 노동자의 죽음이 그저 어느 불운한 개인사일까. 일터에서 죽은 26살 제지공장 노동자 소식을 들으며 누군가는 오늘도 일터로 나가고 있다. 노동이 존중받고 생명이 안전한 일터는 노동자만의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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