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시민참여단 선거제도 개편 공론조사에서 참여자들이 분임 토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서복경 | 더가능연구소 대표
5월13일 저녁, 2주 동안 선거제도에 관해 공부하고 함께 토론했던 시민참여단의 2차 투표 결과가 서울 여의도 케이비에스(KBS)홀 전광판에 게시됐을 때,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이 분야에 낯선 시민들에게 선거제도는 무거운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국에서 모인 시민참여단은 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예상 밖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무엇이 시민참여단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힘을 낼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4천만 유권자를 대표한다는 책임감이었을까? 이렇게라도 참여하면서 우리 정치가 바뀌길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500인 회의’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숙의토론에 임하면서, 그리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과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차후에 나올 백서를 통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이 숙의토론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던 한 사람으로서, 중요한 뒷이야기 몇가지를 해보려 한다.
먼저 이 사건의 출발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나라 최초로 정치제도에 관한 시민 공론조사가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국회의장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들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개특위 위원 개개인이 어떤 생각에서 선거제도 논의를 시민 공론조사에 부쳐보자고 결정했는지는 모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집단적으로 국회가 선거제도 공론조사 시행을 결정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의회정치에서 큰 진전을 이룬 사건이다. 지금까지 선거법 등 정치관계법을 고치는 일은 정치인과 전문가의 영역으로 치부됐을 뿐 시민들에게 개방된 적은 없었다. 시민단체들이 정치관계법 개정을 요구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4천만 유권자를 대표할 수 있도록 무작위로 초대된 시민들에게 정보와 숙의의 공간을 제공하면서 의견을 구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번째는 정개특위 위원들이 공론조사 전 과정에서 보인 태도에 관한 것이다. 선거제도는 개별 국회의원들의 입장에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의제라, 위원들이 시시콜콜 간섭하면서 ‘감 놔라, 배 놔라’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정개특위는 공론조사 용역을 디자인하고 업체를 선정하고 소통하는 일을 담당할 워킹그룹을 구성했는데, 워킹그룹은 정당이나 개별 위원들의 개입 없이 진행 과정 전반을 독립적으로 처리했다. 다만 이미 선거법 개정 법정시한을 넘긴 상황인 만큼 촉박한 일정을 지켜달라는 요구를 받았을 뿐이다.
이번 공론조사 의제가 제한적이라거나, 구체적인 안을 놓고 진행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는 걸 안다. 의제 구성이 이렇게 된 것은, 시간 제약이라는 조건에서 시민참여단이 소화 가능한 범위를 찾은 결과였으며, 정개특위 위원들의 입김 때문은 아니었다. 이번 조사에서 국회의원들은 용역 발주처로서 ‘갑질’을 한 바 없으며, 이런 태도는 공론조사가 본래 취지대로 공정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중요한 전제가 됐다.
세번째는 공영방송인 한국방송(KBS)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한국방송은 서울 본사를 비롯해 대전, 광주, 대구, 부산 지역방송국을 연결해 시민들의 숙의토론 장소를 제공하고, 주말인 토요일 오전과 오후 생중계 시간을 편성해 우리나라 공론조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또 한국리서치,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와 함께 공론조사 기획 단계에서부터 결합해, 영상학습 자료를 만들고 무대와 숙의토론 공간을 새로 설치하고 ‘500인 회의’ 홍보 및 숙의과정 방송송출 기획을 주도적으로 진행했다. 공영방송으로서 한국방송의 역할은, 시민참여단이 짧은 시간이라는 제약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마지막으로, 촉박한 일정에도 밤을 새워가며 자료집을 만들고 온라인 단체방에서 무수한 토론을 거쳐 시민참여단의 게시판 질의에 일일이 답변을 달고 생방송 토론과 현장 질의응답을 소화해낸 전문가 패널들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공론조사는 국회의 전향적인 결정과 태도, 공영방송인 한국방송과 많은 전문가의 노력, 무엇보다 숙의에 참여한 시민참여단의 기대를 뛰어넘는 열정과 책임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회는 이 소중한 성과를 그저 생색내기 이벤트로 치부하지 말고, 선거법 개정의 길잡이로 써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정당제도, 의회제도 등 정치관계법은 물론 국민연금, 기후위기 등 중요한 정책사안을 다룰 때에도 이런 시도를 더 확대해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