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출범하는 국가보훈부 초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한국 사회의 진영 갈등은 보훈 분야에서도 첨예하다. 친일이냐, 친북이냐를 따지며 국가유공자 여부가 갈린다. 정권이 바뀌면 그들에 대한 평가도 바뀐다. 윤석열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가 아닌 8·15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6·25 때에 무게를 둔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백선엽 장군 등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이런 기조를 반영한다. 진보 성향의 학자들은 이를 역사학계에서 이미 정립된 사실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뒤집으려는 시도라고 본다.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에도 건국절 논란 등 이승만 전 대통령 미화 작업이 추진된 바 있다. 그때의 ‘역사전쟁’이 재현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온다. 오는 6월 창설 62년만에 부로 승격되는 ‘국가보훈부’의 첫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역사 뒤집기가 아니라) 제자리 찾기”라고 주장했다. 검사 출신 정치인인 박 처장은 그동안 군 출신이 독점해온 보훈처장에 임명된 후 ‘이승만 기념관’ 추진, ‘백선엽 동상’ 국고 지원 등 윤 정부 지지자들이 환호할 만한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22일 국가보훈부 장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박 처장을 지난 15일 만났다. 그와의 인터뷰는 치열한 논쟁처럼 진행됐다. 또 그는 ‘이승만·백선엽의 공과 과를 다 보자’는 주장을 폈으나, 전체적인 답변을 보면 ‘공’을 부각시키는 데에 집중돼 논리적 모순을 보이기도 했다. <한겨레>는 윤석열 정부 들어 점점 거세지는 ‘이승만·백선엽 띄우기’의 실체를 돌아보려는 차원에서 박 처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가보훈처장으로서 1년을 돌아본다면?
“대한민국 정부 가운데 힘센 부처가 어디냐고 물으면 대부분 기획재정부나 법무부, 국방부 등을 꼽는다. 나는 국가보훈을 담당하는 부처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훈은 공동체가 발전, 번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치다. 공동체가 발전하려면 정체성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보훈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는 동시에 미래를 지향하는 부처다. 그동안 국가보훈처의 존재감이 약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지난 1년 동안 잘했든 못했든 간에 보훈처의 존재감을 어느 정도 각인시켰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승만 재평가 작업에 대해서는 진보 진영을 포함한 국민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나도 학교 다닐 때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독재자’니, ‘분단의 원흉’이니, ‘친일파’니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자랐다. 그런 인식을 바꾼 지가 2~3년이 채 안 된다. 특히 보훈처장이 되고 나서 많은 자료를 보고 학자들과 토론도 하면서 내가 이승만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보든 보수든 많은 전문가들이 각자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 이승만이 ‘걸출한 정치인’이라는 데에는 공감한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분이다. 국민으로부터 박수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아주 형편없는, ‘역사의 패륜아’로 낙인찍혀 있다. 그래서 이승만에 대한 ‘포지셔닝’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 처장은 지난 3월26일 이승만 출생 148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이승만 기념관’ 건립 추진을 공식화했다. 보훈처는 국회와 국민의 의견 수렴을 거쳐 기념관 건립 시기, 규모, 재정지원방안 등을 확정해 내년 예산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독재자 부활 시도’라며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고 나섰고, 진보 진영의 시민단체들도 ‘헌법에 반영된 4·19 정신을 모독한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장기 집권, 친일청산 방해, 양민학살 등 이승만이 저지른 많은 잘못도 역사적 사실 아닌가?
“진보 진영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이라든지 여러 권위주의 정치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그분이 모든 걸 다 잘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잘한 것은 잘한 것대로, 잘못은 잘못대로 받아들이자는 거다. 이승만은 1875년생인데, 20대 때인 1899년부터 1904년까지 5년 7개월을 감방에 갇혀 있었다(이승만은 1899년 입헌군주정을 주장한 만민공동회 사건에 연루돼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체포됐다. 그는 공범들과 함께 탈옥했다가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1904년 특사로 풀려났다). 당시로서는 대역죄를 저질렀다. 조선의 봉건 왕조를 타파하고 ‘주권재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지금으로 보면 ‘민주화 투사’였다.
이승만은 무엇보다 현실 정치, 국제 외교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진보든 보수든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 바로 한미동맹이다. 대한민국의 생존 문제와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프레임이다. 보수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에서도 한미동맹을 그만하자고 말 못 하지 않나. 한미동맹은 미국이 처음에 ‘오케이’ 한 게 아니다. 미국은 안 하려고 했는데, 뛰어난 국제정치적 안목을 갖고 있는 이승만이 미국을 움직여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도장을 찍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을 비롯한 보수 정권에서도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지 않나?
“나는 그것이 이승만의 불운이자, 나라의 불운이었다고 생각한다.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을 부정하고 정권을 잡은 것이다. 중간에 장면 내각이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은 12년 동안 장기집권한 이승만 정권의 부정에서 나왔다. 어떻게 보면 보수가 분열한 셈이다. 누구의 어떤 의지에 따라 발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정치적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이승만은 음지에 처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전두환 정권 등 보수 정권에서도 이어졌다.”
―이승만에 대한 공과는 학계의 연구결과가 버젓이 있는데,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건 아닌가?
“내가 보기엔 지금 학계도 심하게 갈라져 있다. ‘독립운동사’나 ‘해방전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상당히 편식하고 있다고 나는 본다. 학계에 맡긴다고 공정한 평가가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국민의 눈높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965년) 이승만 유해가 하와이에서 한국으로 왔을 때 국장이 아니었는데도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당시 사진을 보면 개인 자격의 장례식이었는데도, 박정희, 노무현 전 대통령 국장 때와 비슷한 인파가 몰려 애도를 나타냈다. 그게 진짜 국민의 평가이고 감정이 아닐까. 그런데 내가 보훈처장이 된 직후에 독립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학회에서 마련한 해외 독립운동에 관한 전시회를 한다고 한번 보라고 해서 봤다. 그 많은 인물 가운데 이승만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이승만 기념관은 공과를 모두 가감 없이 전시하는 것인가?
“이승만 기념관 건립은 지난 1년 동안 공감대가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본다. 물론 반대하는 분들도 여전히 있지만. 기념관을 어디에 지을지, 재원은 어떻게 조성하고, 누가 주체가 될지 등은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다. 과거 전직 대통령들의 사례를 보면, 민간 차원의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돼 거기서 주도적으로 한다. 정부는 재정 지원 등을 할 뿐이다.”
―백선엽 동상 건립에 국고를 지원하는 것도 논란이 많다. (보훈처는 경상북도가 추진하는 백선엽 동상 건립 비용 5억원 가운데 국비 1억5천만원을 지원한다.)
“백선엽 장군은 6·25 때 대한민국이 망하기 직전에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이다. 미국에서도 백선엽 장군을 전쟁영웅으로 인정한다. 6·25라는 게 뭔가. 김일성이 만약에 한반도를 다 차지했다면 대한민국도 인민민주주의 체제가 됐을 것이다. 진보 진영도 그런 체제를 바라는 건 아니지 않나. 백선엽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인물이다. 진보 쪽은 이런 공적은 평가하지 않고, 백선엽의 친일 행적만 부각한다. 친일파라는 근거가, 백 장군이 22살인가 그때 간도특설대에 소속돼 있었다는 것이다. 간도특설대가 독립군을 때려잡은 곳이니까 백 장군도 친일파다 이런 논리다(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2년간 복무한 전력으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됐다). 지난 2020년에 이분이 돌아가셨을 때 민주당에서 서울현충원(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대전현충원에 안장했는데, 그걸 또 나중에 파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원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 장례식 때 비도 오고 궂은 날씨였는데도 많은 시민들이 광화문 시민분향소를 찾았다. 개인 장례식이었는데도 많은 인파가 몰려 그분을 추모했다.”
그러나 백선엽은 생전에 여러 회고록에서 간도특설대 근무 사실을 스스로 밝혔는데, 반성이나 후회를 표명한 적은 없다. <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패배했는가>(1993년, 일본어판)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대표적이다. “(간도특설대는)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던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백선엽은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만주국 장교가 될 수 있는 만주 펑톈군관학교에 입교했다. 당시 똑똑한 조선인 청년에게 일본군 혹은 만주국 장교가 된다는 것은 신분상승을 의미했다. 1941년 12월 2년제인 펑톈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42년 만주국군 보병 제28단에서 견습사관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1942년부터 1943년 1월까지 만주 북부의 자무스에서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하다 1943년 2월 만주 간도성에 있던 항일독립군 탄압부대인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다.
“그런데 지금 현충원 누리집에서 백선엽을 검색하면 ‘백선엽은 친일파다’ 이렇게 돼 있다(현충원 누리집의 ‘안장자 참배/찾기’란에 백선엽을 검색하면 ‘무공훈장(태극) 수여자’와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이라고 소개돼 있다). 그래서 조만간에 적절한 조처(친일 경력 삭제)를 하려고 한다. 지금 법률 검토와 의견 수렴 중이다. 왜냐하면, 현충원은 국립묘지다. 묘지는 사자에 대한 추모 시설이다. 죽은 사람의 흠을 묘비에 적는 경우는 없다. 이것은 백 장군을 괘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화풀이 차원에서 낙인을 찍은 것이다. 학술 서적에나 적어야 할 내용을 현충원 누리집에 기록한 것은, (보수 진영에선) 패륜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법률적으로도 사자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의견도 있다. 차라리 백 장군을 현충원에 안장하지 말든지.”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함께 평가한다’는 원칙이 왜 김원봉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에게는 적용되지 않나?
“김원봉은 문재인 정권 때도 서훈을 추진하다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실 때문에 문재인 정권에서도 부담을 느낀 것 같다. 그렇다면, 참 안타깝기는 하지만, 우리가 독립투사를 평가할 때 최소한의 기준이 뭐냐 하면, 일제로부터 독립할 때 어떤 형태의 자주독립 국가를 만드느냐, 이 점을 분리해서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1945년 광복 이후의 정국에서 김일성이 추구하는 인민민주주의 국가냐, 아니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냐를 두고 어떤 선택을 할 때, 김원봉의 독립운동이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면, 안타깝지만 (서훈이) 좀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지금 여러 가지 정치 상황이나, 또 시대적인 평가나,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다고 본다.”
약산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와 의열단, 한국광복군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장도 역임했다. 하지만 월북 후 행적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는 못했다. 김원봉은 1948년 4월20일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북으로 갔다가 그곳에 남았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감사원)
등 여러 직책을 맡았지만,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노동당에는 가입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김원봉이 김일성 정권 수립을 적극 도운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그는 1958년 6월9일 최고인민회의에 참가한 이후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데, 북한에서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6월 국가보훈부 승격에 대한 포부를 밝히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난해 <한국방송>(KBS)이 ‘베트남 양민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을 때 ‘월남전 참전용사를 학살자로 매도했다’며 사과를 요구했는데, 지난 2월 1심 재판에서 법원은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쟁을, 어떤 한 장면을 핀셋으로 콕 집어서 평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가해자와 피해자, 이렇게 프레임을 짜는 것은, 뭔가 정치적인 음모가 있다고 본다. 전쟁은 복잡하고, 그 자체가 비극이다. 그런데 베트남 전쟁 (전체)를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이다’,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나. 베트남 정부나 국민이 사과를 요구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학살자다’ 이렇게 규정하면, 32만5천명의 참전 용사들의 명예는 어떻게 되나. 그분들은 국가를 위해 청춘을 바친 분들이다. 그분들이 무슨 죄가 있나. 법률가로서 볼 때 1심 재판은 증거 조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최종 결론은 대법원까지 가 봐야 안다.”
박 처장은 월남전 참전용사의 아들이다. 부친인 고 박순유 중령은 박 처장이 7살 때 베트남에서 전사했다. 박 처장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지난 2008년 사재를 모아 베트남전 당시 격전지였던 빈딘성에 작은 도서관을 세웠다. 그의 여동생이 “우리 가족으로서는 아버지가 전사한 아픔이 있지만, 한국군이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것도 사실인 만큼 서로 아픔을 치유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가족을 설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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