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만의 미투’ 주인공 최말자씨(맨 오른쪽)가 지난 2일 대법원 앞에서 여성단체 회원들과 함께 재심 개시 결정을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세상읽기]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사건은 1964년 5월6일 저녁 8시에 일어났다. 가해자는 길에서 만난 최말자씨에게 달려들었다. 최씨는 힘껏 일어나 도망가고자 했으나 계속 붙잡혀 넘어졌다. 가해자에게 제압당한 상태로 그의 혀가 입안에 들어오자 숨 막혀 죽을 것 같았던 최씨는 가해자의 혀를 깨물어 저항했다. 그의 나이는 고작 18살. 그것이 그 밤길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최씨는 사건 이후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았지만, 정작 가해자는 멀쩡했다. 그는 최씨 집에 찾아와 흉기를 책상에 내리꽂으며 “나를 병신으로 만들었으니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고, 이후에는 합의금 명목으로 돈까지 받아 갔다.
형사절차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최씨에게 가혹하게 진행됐다. 가해자는 불구속 상태로 수사와 재판을 받았던 반면, 최씨는 검찰 조사를 위해 출석한 당일 구속돼 6개월 이상을 구치소에서 보냈다. 최씨는 구속영장도 보지 못했고, 구속 사유도 듣지 못했다. 명백히 절차정의 위반이며 재심 사유다.
또한 재판부는 가해자의 혀가 잘렸다며 최씨에게 중상해죄를 적용해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반면, 가해자에게는 고작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주거침입과 협박만 유죄로 인정됐을 뿐 최씨에 대한 폭행 및 강간미수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최씨는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해 더 큰 형벌을 받았고, 그의 삶은 이후 180도 달라진다. 그가 2020년 5월6일 재심을 청구하면서 “56년 만의 미투”에 나선 이유다.
하지만 부산지법은 “사회문화적 환경이 달라졌다고 하여 사건을 뒤집을 수 없다”며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부산고법 역시 “법관의 소송지휘권 행사는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법률적 환경하에서 범죄의 성립 여부와 정당방위를 판단”했으므로 “직무에 관한 죄를 범했다는 점이 증명되었다고 할 수 없다”며 같은 결론을 내렸다. 당시의 기준에 따르면 최씨는 중상해를 입힌 범죄자이고, 성폭행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혀를 깨문 행동은 정당방위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제 남은 건 대법원 판단뿐이다. 결국 최씨는 올해 77살의 나이로 대법원 앞에서 1인시위에 나섰다.
최씨 재심 청구 기각 결정문에 담긴 것은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명백한 부정의이며, 부정의가 당대의 지배 규범이라는 이유로 용인될 수는 없다. 설사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를 중상해죄로 본 것이 당대의 인식이자 규범이더라도, 그것이 옳다고 법원이 재차 확인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와 관련해 미국 법원사에서도 핵심 판례로 다루고 있는 2003년의 ‘로런스 대 텍사스’ 재판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1986년은 미국에 동성애 처벌법이 존재했던 시절이다. 당시 한 남성이 실제로 동성애 혐의로 체포됐고,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지만 그가 유죄라는 법원의 결론은 한결같았다.
2003년 연방대법원에서 이 판결이 뒤집히는데, 여기서 주목할 지점이 있다. 법원은 “당대의 사회문화적 규범에 비춰 이전 판결이 타당하다”거나, “당대의 사회적 환경하에서 동성애를 유죄로 판단했으므로 법 집행이 옳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또한 동성애에 관한 규범이 바뀌었거나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에 판결을 바꾼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헌법으로 보장되는 인간의 기본권과 인권을 따졌을 뿐이다. 따라서 1986년의 판결은 특정한 도덕적 잣대로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으로 결론 내려졌고, 유죄는 무죄가 되었다. 당시 대법관 앤서니 케네디는 지금까지도 회자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리다.”
최씨를 대한민국 법원이 중상해죄로 처벌한 것은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리다.” 최씨 사건에서 드러난 부정의는 사회문화적 차이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진술과 정당방위를 인정해달라는 최씨의 요청을 법원은 이제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새로운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판결을 뒤집을 수 없다는 주장 또한 법 조항에 기댄 핑계일 뿐이다. 애초에 기울어진 장에서 법은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았으며, 이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절차정의가 어떻게 위배됐는지 밝혀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결국 법원의 의지 문제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 정의란 무엇인지 선언할 의지 말이다. 오늘도 1인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제 대법원이 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