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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봄날 조심스레 쥐어본 어느 생명체의 손

등록 2023-05-03 19:08수정 2023-05-04 02:38

‘4·16, 4·19 기념 마라톤’ 행사 때 ‘단짝’이 된 이병곤 제천간디학교 교장(오른쪽)과 권재인양. 제천간디학교 제공
‘4·16, 4·19 기념 마라톤’ 행사 때 ‘단짝’이 된 이병곤 제천간디학교 교장(오른쪽)과 권재인양. 제천간디학교 제공

[세상읽기]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

“곤샘, 저랑 뛰실래요?”

‘4·16, 4·19 기념 마라톤’ 행사 날 아침. 출발을 기다리며 월롱리 마을회관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 틈에서 한 소녀가 다가와 깜짝 제안한다. 입학한 지 두달 돼가는 권재인이었다. “어? 어~. 그러지 뭐”라고 답했다. 화들짝 놀란 마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사실 이 행사는 마라톤이라기보다는 6㎞ 남짓 농로를 따라 학교까지 걷기에 가깝다. 공식 명칭에 담긴 ‘역사적 의미’보다 ‘과연 누구랑 손을 잡고 갈 것인가’에 아이들 마음은 기울었다. 성별, 선후배 가리지 않고 함께 걷고 싶은 상대에게 ‘단짝’ 신청을 할 수 있기에 더 그렇다. 단짝 제안에 수락했을 때 터뜨리는 환호성과 거절 의사를 확인할 때 흐르는 탄식이 4·19 혁명 기념일 즈음 학생생활관 ‘하늘마루’에 가득하다.

“우리 학교에서 교장은 무슨 일을 하는 건가요?” “왜 3학년 때 논문을 꼭 써야 하나요?” “대안학교로 오신 계기는 뭐였어요?” 출발한 지 40분이 지났는데도 재인이의 질문은 그치지 않는다. 4월 하순으로 접어드는 날 햇볕은 따가웠고, 하늘은 짙푸르렀다. 숨이 차오른다. 맞잡은 손에 땀이 찼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놓고 걸었다.

재인이는 쌍둥이 남매 가운데 동생이다. 지난해 여름 아버지가 운전하면서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우연히 인터뷰를 들었단다. 내가 출연했던 공영방송 프로그램이었다. 그길로 학교를 알아보고 두 아이 모두 용감하게 입학지원서를 냈다. 우연이 맺어준 인연이었다.

걷기 경로 중간에 학생회 아이들이 설치한 행사 부스와 기념사진 촬영 지점이 나타났다. 4·16이나 4·19와 관련한 역사 퀴즈 맞히기, 단짝과 사진 찍기 등을 마치고 다시 걷는다. 사진기 앞에서 기록을 남기느라 재인이 손을 다시 꼭 쥐었을 때 내 마음속에 감각 이미지 하나가 퍼뜩 떠오른다. 어린 시절 안방으로 잘못 날아든 작은 참새를 손에 쥔 적이 있다. 양손을 타고 흘러 몸 전체로 퍼져나갔던 작은 생명체의 신비로운 박동. 그것은 전율처럼 내 몸속을 스쳐 지났었지.

‘조심하다’라는 말에서 ‘조’(操)는 손(扌)으로 나무(木) 위에 있는 새(品)를 감싸 쥐는 모양에서 왔다고 한다.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이 곧 ‘조심’이다. “손으로 새를 쥐는 일은, 내 손으로 새를 보호하는 일이면서, 내 손으로부터 새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내 삶을 지켜야 하고, 나로부터도 내 삶을 지켜야 한다.”(신형철, <인생의 역사>)

한 소녀가 중학교 1학년 때 겪은 일이다. 침울하고, 소심해 보였던 친구 글을 글쓰기 수업 시간에 들었다. 당시 수업을 맡았던 ‘곽 선생’이 읽어줬던 거다. “그 애의 글은 문장도 단어도 엉망진창으로 틀린 글이었다. (…) 글을 들은 뒤에 나는 그 애가 안쓰러워졌지만, 동시에 그가 전하는 슬픔이 너무 빛나서 놀랐다. 누군가의 외로움이 부러운 건 처음이었다.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가진 것보다 잃은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그날 수업을 계기로 이 ‘중딩’ 소녀는 자기 주변에 널려 있는 결핍을 샅샅이 살피고 다녔다. 다행히도 그녀가 머물던 기숙사에는 수많은 인물과 목소리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즈음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세웠던 게. 대안학교 출신인 이슬아 작가가 십수년 전 겪었던 이야기다.(이슬아 ‘열네 살,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볼드 저널> 14호)

우연에 또 다른 우연이 겹쳐 재인이가 새처럼 날아 내게로 왔다. 그뿐이랴. 5월의 햇살처럼, 바라보기만 해도 눈부신 아이들 107명이 제각기 다른 사연을 안고 찾아와 지금 내 곁에 있다. 호기심을 잔뜩 품은 채, 활달하게 살아 있는 중1 아이들에게 곧 질풍노도가 덮칠 것이다. 결핍과 생채기를 발견하면서 전혀 다른 심리적 세계를 아프게 겪어내겠지. 그럼에도 아이들은 어느 방향으로든 성장할 것이다. 작가 이슬아가 그랬던 것처럼.

“저랑 뛰실래요?” 물으며 아이들이 내게로 온다. 가슴 벅찬 일이다. 너무 느슨하게 쥐어서도 안 되고, 너무 꽉 조이면 숨 막힌다. 기회와 위기 사이를 덧댄 곡선 위를 아슬하게 걸으며 내 삶과 아이들 곁을 지키는 일, 교육자의 길이다. 도착 지점이 다가온다. 결승선 테이프를 들고 선 학생회 아이들이 저 멀리에서 아른거린다. 산자락 끄트머리에 ‘조심스레’ 학교 건물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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