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9월13일 충남자립지원전담기관에서 열린 자립준비청년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숨&결] 손자영 | 자립준비청년
벌써 여름이 봄을 비집고 들어온다. 해마다 이맘때면 보육원을 떠나 자립에 나섰던 시절이 떠오른다. 자립의 시작은 지방의 한 반도체 공장이었다.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선배들처럼 나도 수월한 취업을 위해 특성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취업하면 돈을 벌 수 있고, 자립의 가장 큰 어려움인 경제적인 걱정을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들어간 회사는 기숙사도 제공해줘서 주거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먼저 자립한 선배들은 혼자 살기 힘들다고 했는데, 내게 자립은 쉽게만 느껴졌다. 보육원 친구들 대부분 나와 비슷하게 여기저기 공장으로 취업했다. 자립 초기 우리들의 공통된 모습이다.
출퇴근을 반복하며 통장 잔고는 착실하게 늘어났지만 생활 안에 진짜 ‘나’는 없었다. 그 시절 나는 좋아하는 것도 없었고,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취업하고 1년6개월쯤 흘렀을 무렵, 함께 자란 보육원 선배들이 잇따라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돈만 벌면 자립은 성공이며 잘 살 수 있다’는 보육원에서 듣던 선생님들의 말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자립해서 진짜로 잘 살기 위해서는 일단 내가 원하는 삶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뒀다.
하지만 진로를 바꾼 대가는 혹독했다. 등록금과 생활비 조달을 위해 자립준비청년과 관련한 여러 정책과 지원제도를 알아봐야 했다. 기숙사에서 나왔으니 살 집도 알아봐야 했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 다니면서 벌어놓은 돈이 조금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 신청도 쉽지 않았다.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아르바이트 3개를 시작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 와중에 알고 지내던 한 어른에게 사기를 당해 열심히 번 돈을 날리기도 했다. 내 삶을 살기 위해 새로운 길을 선택했을 뿐인데 너무 많은 어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자립준비청년이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한 친구는 보육원 선생님의 강력한 추천으로 취업이 잘된다는 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어렵게 자퇴를 결정했고, 지금은 원하는 분야의 취업을 준비 중이다. 친구는 취업 준비 기간 소요되는 시간과 돈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동생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더라면 아마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면 재수를 해야 했을 텐데 형편상 재수는 할 수도 없을뿐더러, 주로 대학생에게만 주어지는 자립준비청년 지원 혜택을 받지 못해 자립의 시작이 정말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이처럼 자립준비청년도 취업했다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하기도 하고, 반대로 대학에 진학했다가 적성과 맞지 않아 그만두고 취업을 고려하기도 한다.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한 새로운 선택이지만 자립준비청년은 더 많이 고민한다. 단 한번의 선택으로 당장의 생활과 앞으로 삶의 계획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립준비청년 지원제도 대부분은 퇴소한 지 5년 이내로 지원 대상이 제한돼 있는 경우가 많다. 보육원을 퇴소하고 5년 이내에 자립해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자립준비청년들은 자립 수당이나 각종 지원책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는 것에 신경쓸 수밖에 없다. 잠깐의 여유나 삶의 방향을 새로 정할 시간을 사치로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을 하든 시계를 곁눈질하는 이런 상황에서 과연 제대로 된 자립을 준비할 수 있을까?
진정한 자립이란 스스로 앞날을 선택하고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며 자신이 원하는 삶에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목표를 향해 조금 더 먼 길로 돌아갈 수도, 잘 가고 있는 건지 점검하기 위해 쉬었다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멈추는 순간 삶 자체가 어려워지는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적성과 진로 탐색은 점점 먼 이야기가 되고 있다. 우리에게도 두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겠다.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은 ‘남은 시간’이 아닌 ‘살아갈 시간’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