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야, 이거 너잖아.”
친구가 그림책을 가져와 쫙 펼쳤다. 빵을 너무 좋아해서 이름이 ‘빵도둑’인 쥐가 빵을 훔쳐먹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말한다. “맛없어!” 부정할 수 없었다. 딱 내 표정을 옮겨 놓았다. 나는 입이 짧다. 게다가 혼자만 안 먹으면 되는데 보란 듯이 맛없는 표정을 지어 주변 사람들의 입맛까지 떨어지게 한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사내놈이 밥 한공기는 싹 비워야지.” 어릴 때부터 이런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시골 친척집에 가면 털이 숭숭 난 돼지비계가 가득한 국에 고봉밥을 주셨다. 나름 챙겨주신 거지만, 나는 비위가 안 좋아 맨밥을 두어번 휘적인 뒤 숟가락을 내려놓을 눈치를 봤다. “깨작깨작 누가 밥알을 세고 있지?” 호된 야단에 속이 꽉 막혀 물조차 넘길 수 없었다.
대학 다닐 즈음엔 많이 나아졌지만, 하숙집 아주머니 눈엔 요주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어쩌다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우면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그래, 오늘은 입맛에 좀 맞나 봐.” 그러면서 처음 먹은 밥의 두배쯤 되는 밥공기를 내놓으셨다. 이상하게 그렇게 압박을 받으면 속이 울렁거려 위장 속 밥이 거꾸로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물론 애정이라는 건 안다.
군대에 가서는 극단적인 애정을 체험했다. 신병으로 배치된 부대는 시범적으로 햄버거를 조식으로 주는 곳이었다. 밥보다는 빵을 좋아하는 터라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데 신병들은 일주일 동안 고참들이 만들어주는 버거를 먹는 게 전통이란다. 아침마다 고참 서너명이 둘러앉아 버거를 내밀며 말했다. “다 먹어야지. 고참이 애정으로 만들어주는 건데.” 그것은 정확한 의도를 가진 식고문이었다.
어쨌거나 시간은 흘렀고 내게도 언제든 숟가락을 놓을 자유가 생겼다. 그럼에도 식사 때 텔레비전이나 유튜브를 틀어놓으면 묘하게 압박을 받는다. 요즘은 먹방을 넘어 탐식과 폭식 스타들이 스포츠 선수처럼 경쟁하는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그들의 식탁이야 먹음직스럽긴 하다. 하지만 세명이서 이십인분 넘는 접시를 쌓아가며 먼저 낙오된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모습을 보면 숨이 막힌다.
그러다 얼마 전 ‘소식좌’들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름 공감하며 찾아봤다. 김밥 몇개도 다 못 먹어 속재료를 꺼내 깨작거리는 모습을 보고선, 그래도 나는 양반이구나 안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과도한 다이어트나 의도적 거식을 부추긴다며 해당 방송분을 삭제한다는 말을 들었다. 우려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저 많은 과식은 왜 그냥 둘까?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 기쁨은 식탐에 경도돼 있다. 옴짝달싹 못하는 팬데믹 시대에 배달음식이 유일한 쾌락이었고, 각종 일자리들이 휘청이며 요식업에 뛰어든 사람이 많아진 상황은 이해한다. 다만 식사가 그만큼 중요한 문화가 됐으니, 서로의 식취향, 식습관, 식사량, 식속도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져야 하지 않을까.
식사 때마다 항상 마지막까지 먹고 있는 친구가 있다. 내가 무심결에 한마디 했다. “넌 그렇게 먹는데 왜 살이 안 쪄?” 친구가 정색했다. “난 많이 먹진 않아. 천천히 먹을 뿐이지.” 정말이었다. 맛에 진심인 이 친구는 모든 음식을 천천히 정성 들여 씹었고, 그러니 식사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너도 참 힘들겠다.” “회사 다닐 때 정말 힘들었지.”
입 짧은 마이너리티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소화력 약한 사람, 매운 음식에 치를 떠는 사람, 새우 알레르가 있는 사람, 오이가 쓰게 느껴지는 사람, 동물에게 고통 주는 음식을 거절하는 사람, 매일 순댓국집만 가는 부장 취향에 질린 사람…. 이들은 메뉴 선택권을 가지지 못한 약자인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무작정 접시를 디미는 건 애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