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의 한 3층짜리 빌라 2층에서 불이 나 나이지리아 국적 어린이 4명이 사망했다. 사진은 이날 오후 빌라 밖 바닥에 그을린 인형이 놓여 있는 모습.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세상읽기]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희경씨, 여기가 따듯하다. 이리로 앉아.”
온기가 있는 자리는 그날도 전기장판 위였다. 맞은편 난로의 열선 두줄이 어둑한 방에 붉은빛을 뿌렸다.
1990년대 중후반께 기억이다. 위기에 처한 가정을 소개하고 청취자로부터 성금을 받아 전달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던 때다. 여러번 그 집을 방문했던 봉사자는 인터뷰할 내게 덜 불편할 자리를 내주려 했고, 나는 몇발짝 안 되는 방을 가르는 전기 코드들을 살피며 다가가야 했다. 대부분 허술한 셋방이나 철거지역에 있는 불안한 방들이었다. 눅눅한 공기에는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지난 3월27일, 안산 선부동 다세대 빌라에서 불이 나 나이지리아인 어린 남매 4명이 숨졌다. 멀티탭 전기 합선이 원인이라고 한다. 뉴스에는 인근 주택의 방바닥과 벽에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멀티탭들이 클로즈업돼 나왔다. 비좁은 공간에 한자리 차지하고 돌아가는 제습기가 2023년임을 멀뚱히 말해줬다. 걸리적거리지만 곰팡이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한 주민이 제습기를 설명했다. 고려인이다. 소방당국은 안산 ‘다문화 특구’ 내 화재 취약 요인을 개선하고, 소화시설물을 점검하며 특히 멀티탭 사용법을 교육하겠다고 발표했다.
30년 전 방송을 위해 찾아간 가정들은 전형적인 유형이 있었다. 조손 가정이거나 한부모 가정, 장애인, 아동, 그리고 실직이나 병을 얻어 취약한 일상이 벼랑 끝에 몰린 경우다. 방값이 싼 곳이었고, 재난이 닥쳤을 때 무너졌다.
지금은 이주민들이 함께 살고 있다. 나이지리아인 가족의 참화는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이 어떻게 자리하는지 말해준다. 화재 취약 요인을 개선하면 가난한 삶은 안전해질까? 퀴퀴함이 거둬진 자리를 방값이 오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차지할 수도 있다. 시장과 안전의 고차방정식 때문이다.
4년 전 미국 워싱턴을 찾았을 때 고층 맨션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주택가 택지도 개발 중이어서 인구가 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역 사람들은 살던 이들이 쫓겨나고 있다고 했다. 공항 세관공무원도, 경찰마저도 살 수 없다며 혀를 찼다. 건설사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 더 크고 좋은 집을 짓고, 집값은 오르고, 일거리 좇아 도심에 살아야 할 사람들은 방을 쪼개어 다른 식구를 받거나 출퇴근에 시간을 더 써야 했다. 뉴욕의 할렘도 반 이상의 흑인들이 밀려났다. 지난겨울 안양 평촌에서 머물렀는데, 시장 가는 길에 아파트 모델하우스 방문 인파를 마주했다. 20층 너머 올라가는 그곳은 다세대주택이 꽉 차 있던 곳이다. 거기 살던 이들은 새 아파트 20층 사이사이로 안착하는 중일까?
가난이 위기로 추락하지 않도록 하고자 우리는 복지라는 틀을 작동시켜왔다. 다양한 형태의 임대주택들도 이 속에 있다. 이제 그 안으로 외국인 이주민을 포용해야 할 때가 아닐까? 지역에 살며 세금을 내는 그들의 사정에 맞게 한부모 가정, 다자녀 가정, 장애 가정 등을 위한 정책 속에서 안전망을 갖추도록 해야 할 것 같다. 한국 경제의 일정 부분을 담당하는 이들이며, 한국에서 나고 자라는 그들의 아이들 마음속에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자리잡히고 있다. 내국인에게 돌아갈 자리도 부족한데 외국인 이주민에게까지 혜택을 넓힐 수 없다 주장한다면, 부족한 파이를 키우도록 정책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국가 공동체를 갈등으로 분리 통치하려는 시도에는 언제나 정치적 셈이 도사려 있었다. 그 결과 재난이 닥쳤을 때 호명되는 이름의 다수는 여전히 서민들이다. 서민을 위한 정책에만 ‘포퓰리즘’이라는 딱지가 붙는다는 것을 챗지피티(ChatGPT)도 아는데, 인간의 두뇌만이 휘둘리는 21세기이다.
광주의 한 중학교 국어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옆자리 선생님이 언짢아하길래 연유를 물었단다. 상담 신청을 한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통화 가능하세요?’ 하니 ‘아니’라고 답하고, ‘그럼 언제 통화하실까요?’에 ‘다음주 금요일’ 이러고 끊었다고 했다. 국어선생님은 누구 엄마냐고 물었다. ○○ 엄마라고 했다. ‘그 엄마 아직 한국어를 잘 못하셔요’라고 말하자 그 선생님 얼굴이 펴지더란다. 이제 교사들도 한국어 못하는 부모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국어선생님은 덧붙였다. 학교도 현실을 살피며 마음을 다잡고 있다. 정책을 이끄는 지도자라면 그 엄마의 아이가 성인이 될 4년 뒤 정도는 내다보며 일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