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초과생산분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사도록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 찬반 투표 결과가 지난달 23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전광판에 표시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세상읽기] 김공회 |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서 진중권 교수의 발언을 접하고 씁쓸했다. 그는 정부의 농촌 지원 정책을 두고 ‘70대 노인과 외국인 노동자를 먹여 살리는 데 헛되이 돈을 쓰는 것’이라고 해서 구설에 올랐다.
진 교수가 속한 정의당 이정미 대표가 진 교수를 비판했고, 여기에 진 교수가 수긍하면서 사태는 잦아든 듯하다. 그러나 과연 그게 끝일까? 나날이 인구가 주는 지방 시·군을 지원하는 정책들이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정부 특정 정책을 두고 찬반을 따지는 것은 민주시민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책의 효율성을 따지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러워야 한다. 효율성은 형평성 같은 다른 가치들과 충돌하기 마련이고, 실행 과정에서의 여러 어려움 때문에 그 자체로는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정책이 시행되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런 효율성 논란이 우리 사회에서는 유독 지방에 대한 지원책을 두고서 자주 벌어진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자기 주변의 일에는 좀처럼 의견을 내지 않는 사람들도 지방에 관해서는 쉽게 말할까? 지방혐오라고 꾸짖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 부여도 가능하다. 인구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사는 우리나라에서 지방은 ‘우리 자신이지만 우리가 아닌 곳’으로, 우리 자신을 어느 정도 객관화해볼 수 있는 대상일 수 있다.
올해 정부 예산 640조원 가운데 비효율적으로 쓰이는 돈이 적지 않겠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방은 인구가 적고 구성도 비교적 단순해 특정 정책을 둘러싼 이해관계도 덜 복잡하고, 수도권에 사는 우리 국민 절반의 삶과도 어느 정도 동떨어져 있기에, 농업 지원 예산처럼 효율성이 떨어져 보이는 정책을 찾아내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할 것이다.
이제, 농업 지원 예산에 댔던 효율성의 잣대를 다른 곳에도, 이를테면 기업 지원 정책에 적용함으로써 일반화해보면 어떨까? 흔히 지방의 기초지방자치단체들이 세우는 흉측한(?) 조형물들이 ‘지방의 문제’로 비난을 받곤 하는데, 혹시 서울에는 그런 것이 없는가? 때때로 서울의 조형물들이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 그 칼날은 그것을 세운 특정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으로 향하지, 누구도 그것을 ‘서울의 문제’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방을 배경으로 획득된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위와 같이 일반화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애초 지방을 판단할 때 적용했던 기준이 지나치게 단순했음을 깨닫는 반성의 과정을 걸을 수도 있다. 어떤 쪽이든 그런 인식은 우리가 사회를 한층 깊이 들여다보도록 이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진 교수는 어느 쪽으로도 나아가지 않고 지방 그 자체에 멈춰버림으로써, 외려 그의 발언은 그의 지방에 대한 편협한 인식, 정부 정책에 대한 일면적인 시각만을 드러내고 만 셈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우리 사회 전체로 나아갈 수 있는 문제 제기를 지방에 국한함으로써, 우리 사회 ‘진짜 문제’가 은폐되는 의외의 결과가 달성되니 말이다. 이것은 지방이 갖는 두번째 의미라고 할 만한데,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달
<강원일보> 박서화 기자가 ‘‘지방대 문제’는 없다’라는 칼럼에서 날카롭게 다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이른바 ‘지방대 문제’란 ‘한국 사회의 학력차별, 계급차별, 수도권 중심주의가 한번에 합쳐져’ 조성된 담론지형으로서, 그것의 실체는 ‘자본의 착취구조가 야기한 불형평과 차별, 그리고 이와 붙어 세를 불리는 수도권 중심주의’다. 실상이 이런데도 낮은 학력과 취업률이라는 표면의 결과만을 놓고 지방대를 향해 ‘담대한 구조개혁’을 요구하는 게 현실이니, 위의 은폐는 성공적이라고 해야 할까?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는 말이 있다. 지금 지방의 현실이 딱 그렇다. 지난 정권의 ‘균형발전’이 ‘말잔치’에 지나지 않았대도, 지금은 그조차 그리울 지경이다. 어느 정도 그릇된 편견에 기댄 것일지라도 사람들이 지방에 관해 자주 얘기했으면 좋겠다. 나아가 바라건대, 그 똑같은 잣대를 수도권에 대보길, 그리고 지방을 다시 보길. 그러면 지방의 거의 모든 문제가 수도권의 문제, 당신들의 문제로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