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3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조태용 신임 국가안보실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함께 퇴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종대 |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대통령실 김일범 의전비서관에 이어 이문희 외교비서관과 김성한 안보실장이 블랙핑크, 레이디 가가 미국 합동공연 파동으로 목이 달아났다. 질 바이든 여사가 합동공연을 요청했다는 주미 한국대사관의 전문을 열람하고도 후속 조치를 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김 비서관이 물러나면서 시작된 사태는 김 실장 경질로까지 이어졌다.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전후 상황을 잘 살펴보자.
필자가 취재한 바로는 3월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의 요청을 묵살한 것에 격분해 공직 감찰을 지시했고, 그에 따라 두 비서관에 대해 가혹한 인사조치가 이어졌다고 한다. 정상회담에서 문화공연에 관한 문제라면 문책은 김일범 비서관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의전 계통이 아니라 정상회담 의제를 관리하는 정책 계통에 있는 외교비서관에게까지 책임이 확대되자 김성한 안보실장은 문책이 부당하다고 항의했다. 그러자 김 실장은 윤 대통령에게 불려가 “안보실은 엉망진창”이라는 모욕적인 질책을 받은 데 이어 자신도 물러나는 파국을 초래하고 말았다.
4월 말 한-미 정상회담은 당면한 안보 위협을 관리하고 국제적인 공급망 재편의 충격을 완화해야 할 중차대한 행사다. 이런 국가 대사를 앞두고 문화공연을 이유로 안보실 핵심 인사들이 연이어 낙마했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감독과 선수를 교체한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 불가사의한 사건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나? 풀리지 않는 핵심 의혹이 있다.
첫째, 미국 합동공연 아이디어는 누구에게서 나왔나? 질 바이든 여사가 최초로 제안한 공연이라면 공연비는 당연히 블랙핑크를 초청한 미국 부담이어야 한다. 거액의 공연 비용을 한국이 부담한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를 보면 공연을 추진한 건 애초 미국이 아니라 한국 쪽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블랙핑크 소속사 역시 미국 공연을 “제안받은 바 있다”고 언론에 밝힌 만큼, 공연에 냉담했던 안보실 말고 국내에 이 공연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별도의 세력이 있는 것 같다. 안보실장을 날릴 만큼 문화공연에 집착하는 힘센 세력의 정체는 뭐냐.
둘째, 윤 대통령은 안보실이 최소 다섯차례 미국의 공연 문의를 무시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서 듣고 공직 감찰을 지시했나? 한 보수언론은 3월9일 윤 대통령이 울산으로 이동하던 중 정상회담 준비차 미국을 방문 중인 외교부 고위 간부로부터 안보실의 주미 대사관의 전문 묵살 소식을 들었다는 내용의 칼럼을 게재했다. 필자가 취재한 바로는 당시 정상회담 준비차 미국을 방문한 인사는 외교부의 의전담당 인사로 확인된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인사가 외교부 장관과 차관을 제치고 윤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겠는가. 이런 비정상성은 현재 대통령실 안에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비공식적인 정보 흐름이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셋째, 안보실 주요 직위자들을 가혹하게 문책하면서 김태효 1차장에게는 왜 어떤 책임도 묻지 않는가. 김태효 차장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을 겸임하고 있다. 대통령에게 매일 보고되는 외교와 안보 분야 정보를 관리하는 책임자가 바로 김태효 차장인데, 이 사안과 관련해서 어떤 문책을 받았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김 차장이 특별한 이유가 뭔가.
안보실 사태 이후 후속 인사는 더 기이하다. 김태효 차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에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을 역임했다. 그 당시 김태효 비서관 밑에서 신임 미국대사로 지명된 조현동 외교부 1차관, 이도훈 외교부 2차관, 임종득 안보실 2차장, 이종섭 국방부 장관이 행정관으로 일했다. 여기에 대통령실 비서관급 인사들까지 고려하면, 현 정부 외교·안보 라인은 김태효 독주 체제이자 ‘이명박 시즌 2’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판 네오콘’이라고 할 만한 이들이 장악한 안보실과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대통령 비서실과도 분리된 독자적인 왕국이다. 과거 이들이 활약한 이명박 정부 당시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 파동,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한-일 군사협정 체결 시도 등 외교·안보에서 숱한 실패와 혼란의 연속이었다. 국민 정서와 사법부 권위마저 부정하는 현 정부의 국익 포기형 굴욕외교는 바로 그 연장선에 있다. 새로 부임한 조태용 안보실장이 이 혼란을 제대로 수습할 수 있겠는가.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나을 듯하다. 문화공연 하나로 박살이 난 안보실에서 제대로 처신하지 않으면 전임자 꼴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