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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요구하라 “시대에 맞는 문학”을

등록 2023-03-26 18:08수정 2023-03-27 02:39

1988년 72살이던 영국 동화 작가 로알드 달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어린이 독자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1988년 72살이던 영국 동화 작가 로알드 달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어린이 독자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한겨레 프리즘] 최원형 | 책지성팀장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마틸다> 등 유명한 동화 작가 로알드 달의 작품들이 대대적으로 수정된 일이 최근 논란을 일으켰다. 유족과 출판사의 협의에 따라 남자(men)를 사람(people)으로, 뚱뚱한(fat)을 거대한(enormous)으로 바꾸는 등 오늘날 독자들이 ‘부적절하다’고 여길 표현 수백개를 고쳐서 출간하자,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논란은 제임스 핀 가너의 책 <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1994)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편견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리고 잘못된 과거 문화의 영향을 깨끗이 씻어내”겠다며 서양 전래동화들을 다시 써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백설공주’의 난쟁이들은 ‘성장에 어려움을 겪은’ 이들로, 스스로 “정신적으로 드높은 거인”이라 칭한다. “광산을 채굴해 생계를 유지하다가, 이 행성을 그런 식으로 약탈하는 것은 부도덕하고 근시안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난쟁이들과 왕자가 보인 성차별적 행태에 경악한 백설공주와 왕비는 친구가 되어 “여성의 영혼과 육체 사이의 균열을 치료”하기 위한 센터를 설립한다.

이쯤 되면 작가의 진정한 목적이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눈치챌 수 있다. 1960년대 미국 민권운동으로 인종·젠더·장애 등을 이유로 주변화됐던 소수 집단들의 재현·대표 문제가 불거졌고, 이는 차별과 편견에 물든 관습을 바로잡으려는 운동으로 번졌다. 이 책은 80년대를 휩쓴 정치적 올바름 운동을 겨냥한 풍자다. 지은이는 “피시(PC)어의 특징은 아주 긴 표현에 있다”며, “가난하다”는 표현을 “경제활동권의 혜택 밖에 놓여 있다”, “화폐경제의 착취를 당하고 있다”로 바꾸는 예시를 든다. 차별과 편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의도를 최대한 감추는 ‘완곡어법’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해도 주머니의 돈은 늘어나지 않지만, 적어도 어휘만은 확실히 늘어난답니다.”

언어를 바꾸는 일은 현실을 바꾸는 일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진 않는다. 언어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문제적 현실을 언어 뒤로 숨기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자기 주도 학습’은 학습자가 스스로 이끌어가는 교육 방향을 제시하지만, 현실적 조건이 받쳐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수자는 이 말 뒤에 숨어 책임을 방기한다. 로베르트 팔러는 <성인언어>(도서출판b)에서 이를 “언어가 현실을 가리키기를 포기한 것”이라 비판한다.

가너의 책은 이처럼 언어를 ‘교정’하는 것으로는 차별과 편견을 해소할 수 없으며 되레 역효과를 낳는다는 비판을 풍자의 형태로 담아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비판이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는 결론으로 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가 풍자가 아닌 조롱으로 읽힌다면, 그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현실 속 권력구조와는 무관하게 모든 대상을 비틀고 웃음거리로 삼음으로써, 차별과 편견을 인식하는 효능감 자체를 감소시키고 독자로 하여금 안온한 관습에 머물게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어린이 책들을 분석해 ‘다양성 지표’를 만드는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학 어린이책협동센터는 열람실과 구분된 별도의 아카이브 공간에 옛날 책들을 잔뜩 비치하고 있다. 한때 많이 읽혔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온 도덕적·미학적 가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대중 독자들에게 추천되지 못한 채 ‘연구 사료’로 남게 된 책들이다. 가장 권위 있는 어린이문학상인 ‘뉴베리’ 메달 초대 수상작 <인류 이야기>(1921)도 이젠 사서들 추천 목록에 들지 못한다. 문학이 차별과 편견을 조장해 약자에게 불리한 현실을 재생산하는 관습을 옹호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것을 ‘읽지 않을’ 권리와 책임을 지닌다. 독자 대중이 문학에게 ‘시대에 맞게 변화하라’ 요구하는 것은 결코 조롱받아야 할 일이 아니며, 문학은 생각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이에 응답할 수 있다.

circle@hani.co.kr

펭귄출판사의 임프린트인 퍼핀출판사에서 개작 작업을 통해 올해 2월 펴낸 로알드 달의 대표작 &lt;마틸다&gt;. 누리집 갈무리
펭귄출판사의 임프린트인 퍼핀출판사에서 개작 작업을 통해 올해 2월 펴낸 로알드 달의 대표작 <마틸다>.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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